뜬금없는 색상이 갖는 위력
회사 업무 특성상 두 명씩 짝을 이뤄 일을 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어떤 사람과는 시너지가 잘 나지만 어떤 사람과는 초반부터 업무를 하기가 쉽지 않다. 아무렇지 않게 ‘언제 애를 낳고 회사를 그만둘 것인지.’ 물어보는 태도부터 ‘정보 공유’에 대한 부분까지 맞지 않았다. 이유야 어떻든 업무를 하는 데 있어 자료에 잘못 기재된 내용이 있다면 내게 직접 수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말하지 않고 팀장님께 바로바로 보고를 하는 태도에 감정이 상하는 경우도 많았다. 결국 해당 동료와 함께 일하기를 주저하게 되었고 그다음 해 그동안 맡았던 업무와는 색깔이 전혀 다른 업무가 배정되었다. 지금 그때 상황을 돌이켜보면 잘 안 맞는 파트너와 떨어진 채 새로운 업무를 하게 된 것이 나를 더 성장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당시엔 갑자기 낯선 업무에 놓이게 된 상황이 황당하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했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빨리 완성도를 높이고 싶을 때가 온다.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빨리 완성을 해서 전체적인 윤곽을 보고 싶기도 하고, 이 그림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싶을 때 전체적인 분위기를 빨리 파악하고 싶기도 하다. 사람마다 빨리 완성도를 올리는 필살기가 있겠지만 나 같은 경우 가장 자주 사용하는 색상과는 정 반대의 색상을 뜬금없이 칠하는 편이다. 도무지 현재 그림과 어울리지 않는 색상을 툭 던지듯 칠해본다. 갑자기 확 대비되는 반사광을 넣는다던지 가장 어두운 그림자를 툭 집어넣어 가장 튀고 눈에 들어오는 색깔을 칠해보는 것이다. 처음 갑자기 어색한 색상이 그림 안에 들어가면 순간적으로 ‘망했다.’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러면서 이 그림을 끝까지 그릴 것인가 중간에 포기를 해야 하는가 라는 충동에 휩싸이기 시작한다. 마치 회사를 다니면서 뜬금없는 일을 만났을 때 당혹스러운 것처럼 그림 위에 어색한 색이 올라가면 혹시나 잘못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먼저 된다.
하지만 수많은 그림을 그리면서 알게 된 사실은 이렇게 뜬금없는 색상이야말로 그림의 완성도를 가장 빨리 올려준다. 사람의 얼굴을 그리기 위해 살색을 전체적으로 칠했다면 살색이 완성도를 올리는 게 아니라 음영이 나타난 짙은 갈색이 들어간 순간 훨씬 깊이감이 생기고 흰색에 가까운 반사광이 들어간 순간 입체감이 생기는 이치라고 해야 할까? 물론 이런 색상을 과감하게 쓰려면 그만큼 판단에 대한 자신감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몇 번 색상을 써보며 시행착오를 겪다 보면 제아무리 어색한 색상이 들어가도 저마다의 이유가 생기기 마련이다. 사람 얼굴에 갑자기 오렌지 색을 사용했다 할지라도 처음에는 어색하고 망한 색상이라 여길 수 있지만 오히려 독특하고 안 어울릴 것 같은 색상이 전체적인 분위기를 힘차게 바꿔 놓을 때가 많다.
가장 문제는 어색한 색상이 위에 덧칠해지니 망쳤다고 여기며 지레 겁을 먹고 그만두는 것이다. 튀는 색깔 때문에 그림이 순간적으로 이상해 보여 멈추면 그 그림은 정말 이상해진다. 어색한 색상이 올라갔을 때 손가락을 활용하든, 붓을 활용하든 살살 문질러가며 은은하게 섞이도록 할 때 비로소 제대로 된 깊이감이 생기는 법이다.
뜬금없는 업무를 맡았을 때 헛헛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 유화도 그리고 디지털 드로잉도 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 사람을 그려 보았다. 회사에서 정치적인 사람들 때문에 상처를 받기도 하고 내게 주어진 뜬금없는 일에 화가 났던 순간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면서 어쩌면 이런 일들이 밋밋한 색상의 뜬금없는 색상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사실 그림에서는 이런 색상의 역할이 무척 중요하기 때문이다.
회사에서도 어디에서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뜬금없는 일을 종종 만나게 될 것이다. 매 순간마다 당혹스러울 테지만 그럴수록 붓을 잡아야겠다. 뜬금없는 색깔들이 어떻게 그림 속에서 자기 색깔을 만들어가는지 그 과정을 천천히 지켜봐야겠다. 내 삶 속의 이벤트가, 어쩌면 나 자신이 가끔은 뜬금없는 상황에 놓일지라도 이 어색한 색상들이 결국의 그림 하나를 완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듯 포기하지만 말아야지. 오늘도 뚜벅뚜벅 그림을 그려 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