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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 Jun 07. 2020

그림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

일단은 큰 방향부터 빠르게, 디테일은 천천히 

벌써 한 해의 반이 지나가고 있다. 크고 작은 전시 준비로 정신이 없을 때 즈음 팀장님께서 업무 지시를 하셨다. 그동안 만들었던 보고서 작업과는 다른 형태의 업무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형태의 일이라 처음부터 의지도 컸고 생각도 많이 했다. 오랜만에 잘하고 싶은 업무를 만난 느낌이었다. 회사 외에선 한동안 회사 일을 하지 않고 오롯이 가족과의 시간이나 내 취미생활만을 위해 시간을 사용하겠다고 마음먹었건만 그 업무를 만나고 한동안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바로 업무를 시작하였다. 


재미있는 업무이고 오랜만에 잘하고자 하는 마음이 커지니까 생각보다 시작이 힘들었다. 시간은 다가오고 마음이 초조해졌다. 이렇게 잘하고자 하는 마음이 클 때면 신경이 예민해지면서 안절부절 해진다. 늦은 시간까지 고민을 하다 집에 들어왔는데 유독 집 한편에 걸어 놓은 그림 한 장이 보인다.     




우리 부부의 얼굴을 직접 캔버스에 그려 넣은 그림인데 처음 이 그림을 그릴 때도 시작조차 하기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사람의 얼굴을 그린다는 건 꽤 부담스러운 일이다. 잘못 그리는 순간 상대방에게 폐가 되고 괜히 미안해서 사실 실제보다 더 잘 그리거나 비슷하게 그려야 그나마 선물로서 의미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려야 할 땐 더욱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하지만 잘 그리고 싶다는 부담 때문에 발만 동동 굴러서는 아무것도 완성되는 건 없다. 그림은 머리로 그리는 게 아니라 손과 엉덩이로 그려내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어떤 그림이든 마음만으로 그려지는 그림은 없기에 대충이라도 선 하나, 동그라미, 네모, 세모를 그려놔야 거기서부터 다듬어지기 시작한다. '나중에 수정하자. 이상하면 할 수 없지.'라는 심정으로 대충 큰 형태를 잡아보았다. 의외로 큰 형태가 빠르게 나오니 세부적인 디테일이 하나씩 손을 보며 형태가 다듬어져 나갔다.     


망치면 다시 지우고 그리면 된다.

 이렇게 생각하고 용기를 가져보기로 했다. 아무렇게나 타원형을 그리고 눈, 코, 잎 구도를 잡으며 시작을 했다. 처음부터 쌍꺼풀을 그리지 않고, 처음부터 잘 그리려고 눈꼬리가 위로 향하는지 밑으로 향하는지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전체적인 위치만 잡았을 뿐이다. 아주 빠르고 시원하게 위치를 잡으면 그다음부터 코, 눈, 입을 연상시키는 도형을 그려 넣기 시작한다. 큰 방향에 맞춰 세부적인 디테일은 계속 다듬어 나가기 시작한다.        





모든 그림은 처음부터 완벽하지 않다. 그저 처음엔 도형과 몇 개의 가이드라인으로 시작할 뿐이다. 형태를 잡아놓고 빠르게 전체적인 방향을 정해놓는 용기를 가지면 그때부터는 마음이 한결 편하다. 눈에 보이는 게 없으니 더욱 초조해지고 결국 스트레스만 받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큰 구도를 대충이라도 선으로 잡아놓는다면 그다음 수정하는 것은 훨씬 부담이 적어진다.       


뭐라도 시작을 하려면 빠르게 선 몇 개를 그어놔야 한다. 설사 지워지는 선이라도 몇 개를 그어놓고 시작하는 것과 하염없이 구상만 하는 것과는 천지차이이다. 처음의 부담감을 내려놓는 연습은 수많은 그림을 통해 계속하게 된다. 아마 이렇게 그림을 그리는 태도와 습관이 천천히 내 삶에 베어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한동안 회사 업무로 정신없어 완성하고 싶은 몇 장면을 손도 못 대고 있었다. 이 역시 짧은 시간에 과연 완성도 있게 그림이 나올 수 있을까?라는 생각 때문일 테다. 하지만 어차피 이상하면 다시 지우고 또다시 그리면 되니까 전체적인 틀을 먼저 빠르게 그려 넣어야겠다. 연필과 지우개, 종이는 충분하다. 생각은 그만하고 대충이라도 큰 방향성을 속도감 있게 만들어가는 연습을 계속해 나가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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