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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 Jul 20. 2020

시간을 대하는 태도

소소한 시간이 주는 힘

8월에 진행되는 전시 준비로 마음만 분주하다. 아무래도 전시가 예정되어 있으니 더욱 열심히 그림을 그리겠다고 다짐하지만 막상 정신없이 회사 업무를 하다 보면 제대로 된 그림보다는 낙서만 하고 집에 오는 경우가 많다. 끄적거린 몇 개의 선만 볼 테면 다시 마음만 분주해진다. 전시를 함께 준비하는 사람들끼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데 그때마다 작업한 결과물을 조금씩 보여준다. 안타깝게도 별다른 진도가 나가지 않아 어색한 웃음만 짓고 돌아오길 몇 주째, 결국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일찍 집에서 출발해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한 시간 정도 일찍 합정역에 도착해 생각했던 디저트 일러스트를 구상해보았다. 이번 전시 주제는 '디저트'인데 한국의 디저트를 표현할 예정이다. 내가 다녀온 호떡 맛집들을 그리면서 느꼈던 생각이나 추억을 풀 계획이다. 한 시간 뒤 미팅에서 뭐라도 요즘 그리고 있는 작품이나 내 생각을 보여주기 위해 머릿속 생각을 아이패드에 쓱쓱 담기 시작했다. 연필로 위치를 정하고 호떡의 위치를, 호떡을 잡고 있는 손을, 얼굴의 위치를 천천히 잡기 시작했다. 


생각만 하고 아이패드를 꺼내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지만 막상 아이패드를 꺼내 앱을 실행시키고 한 줄을 그어보는 데까진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히려 10분 내 벌써 이렇게 큼직한 구도를 잡을 수 있다는데 나 자신이 놀라울 따름이다. 본격적으로 큰 구도 위에 색을 입혀보기로 했다. 두꺼운 브러시를 꺼내 들고 슥슥 칠하고 보니 단 5분 만에 전체적인 톤이 깔리게 되었다. 어차피 디지털 드로잉은 내 마음에 안 드는 선은 취소 버튼 하나만 누르면 되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더 과감하고 빠르게 붓터치를 해보니 어느새 그림의 대략적인 모습은 나타나기 시작한다. 무려 30분 사이에 그토록 고민했던 호떡 그림이 나타난 것이다.  


"작가님 오늘 일찍 도착하셨네요! 와, 이번 작품이에요? 많이 하셨다!"


모임 시간보다 한 시간 더 일찍 와서 슥슥 그려 넣었을 뿐인데도 사람들은 내 작품을 보고 기뻐했고, 색감이나 구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내 머릿속에만 가둬 놓았을 땐 듣지 못했던 이야기를 자유롭게 들을 수 있는 특권이 생긴 것이다. 무엇보다 머릿속에 들어있는 나만의 생각을 도화지 안에 꺼내 놓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완성도 있는 작업을 하는데야 시간이 걸리겠지만 머릿속의 생각을 일단 화폭에 담으면 거기서부터는 그림의 가속도가 붙게 된다. 문제는 머릿속의 생각을 꺼내는 데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점인데 집중력 있게 시간을 투자한다면 10분만이라도 생각을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짧은 시간 동안 그림을 그린 뒤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기분이 좋아 소소한 시간마다 그림을 그려 보았다. 이번엔 합정역에서 마곡나루 역으로 이동하는 사이에 지하철 안에서 아이패드를 꺼내 스케치를 해보았다. 마곡나루 카페에서 남편을 기다리는 사이 다시 스케치북을 꺼내 드로잉을 해보았다. 스쳐 지나갈 법한 시간들 속에 드로잉이라는 행위를 넣으니 시간을 내 붓 안에 움켜쥐는 것만 같았다. 단순히 흘려 지나갈법한 시간을 내가 박제해 놓는 기분이다




10시간 동안 온전히 힘을 다해 그릴 수 있는 작품도 많겠지만 10분이라고 못 그리는 건 아니었다. 단 10분이 주어진다면 손에 힘을 빼고 얼마든지 자유롭게 표현할 대상과 소재가 무궁무진하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시간의 양이 아니라 그 시간에 그림을 그리겠다는 마음 바로 그 자체였다. 전시 준비의 시작은 발만 동동 구르면서 어떻게 그림을 그려야 할까 걱정이 이만저만도 아니었지만 이렇게 소소한 시간마다 소소하게 그림을 그리겠다고 다짐을 한 이후 하나씩 일러스트가 나오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호떡을, 다른 사람도 웃으며 떠올릴 수 있도록 오늘도 소소한 시간마다 소소하게 그림을 그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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