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 부진의 원인과 해결책
지난주 목요일 정오 무렵 휴대폰 벨소리가 나를 다급히 불렀다.
"샘! 저 영어 25점 올랐어요. 하나 안 고쳤으면 90점인데...(실제 성적은 90.6점)"
대학에서 산업 디자인을 전공하고 싶어 하는 고등학교 1학년 Y 군이었다. 중간고사 영어 시험이 끝나자마자 나에게 먼저 알려주고 싶었단다. 논리력을 요구하는 수능 모의고사는 1등급을 유지했지만 세부 내용을 다 암기해야 하는 내신 성적은 60-70점대에 머물러 왔었다.
토요일 새벽 얇은 이불 때문에 추워서 잠이 깼다. 몇 시나 되었나 보려고 협탁 위에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문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선생님 늦은 시간에 문자 드려서 죄송합니다. 지금 단어 외우고 있는데 내일 아침 11시에 수업하면 제가 100% 다 흡수를 못할 거 같습니다. 일어나셔서 이 문자를 보시면 다른 시간대에 수업 가능할까요?"
태권도를 하는 고 3 D군이 새벽 2:30에 보낸 것이었다. 도장에서 11시 넘어 훈련이 끝나서 그 새벽에 영어 단어를 외우는 중이었나 보다. 지난 수능 모의고사에서 처음으로 70점대로 영어 성적이 올랐고 단어 암기량을 50개에서 80개로 스스로 늘렸다.
나는 학습 심리 전문가로서 성적이 부진한 아이들의 원인을 파악하고 정서상의 문제나 부족한 학습 전략을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이때 영어를 도구로 활용한다. 영어 독해를 하려면 (1) 문자와 문장을 인지하는 시각 지각 능력(visual input), (2) 장기 기억(long-term memory)에 저장된 영어 어휘의 의미를 되살리는 능력, (3) 문장 해석에 필요한 영문법 규칙의 적용력, (4) 핵심 내용(주제)과 세부 정보를 머릿속에 유지하는 작업기억(working memory), (5) 행간에 포함된 내용을 추론하는 능력과 같은 복잡한 인지 능력이 한꺼번에 요구된다. 따라서 지능 검사를 하지 않고도 (6) 학습자의 집중도, (7) 타깃 정보의 습득에 적합한 학습 전략의 구사력, (8) 어려운 과제에 대한 심리적 조절 능력을 파악할 수 있다. Y군과 D군은 (2)와 (3)의 어휘, 문법 지식은 부족했지만 (1), (4), (5)의 일반적인 인지력은 평균 이상이었다. 다시 말해서 지능은 높은 편이지만 노력이 부족한 학습자들이었다. 특히 Y군은 쉬지 않고 공부를 지속하는 지구력(6)과 과목별 학습전략을 달리하는 능력(7)이 부족했고, D군은 감정에 예민해서 부정적인 감정(분노)이나 긍정적인 감정(기쁨)에 휘말리면 해야 할 일을 내팽개치는 유형(8)에 속했다.
고 1인 Y군을 작년 10월에 처음 봤을 때 그는 의기소침해 있었고 나를 경계했다. 예정된 상담 시간에 나타나지 않거나 1시간이나 지나서 졸린 음성으로 자다가 이제 일어났다고 전화하곤 했다. 부모님은 사업상 중국 출장이 잦고 늦게 퇴근하시는 날이 많다 보니 과외 선생님에게 공부를 맡겼으나 학교 성적이 50-60점대였다. Y군은 가까운 친구들이 외고, 과학고, 자사고에 입학했는데 자신만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게 되어 뒤늦게 미술 공부를 시작했지만 자괴감으로 인해 매사에 의욕이 없는 상태였다.
어느 날 Y군은 나에게 김광석을 아느냐고 물었다.
"김광석을 어떻게 알아? 대학 때 김광석 콘서트 보러 대학로 소극장에도 몇 번 갔지. 김광석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친한 친구를 잃은 것 같았는데."
라고 했더니 나에게 이적이 부른 <걱정 말아요 그대>를 들어보라는 '숙제'를 내고 갔다. 한국을 2년 반 동안 떠나 있다 보니 그 노래는 처음이었다.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
그대는 너무 힘든 일이 많았죠
새로움을 잃어버렸죠
그대 슬픈 얘기들 모두 그대여
그대 탓으로 훌훌 털어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요
주말 내내 이 노래를 반복해서 들었고 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Y에게 문자를 보냈다.
'반복 재생해서 듣고 있는데 가사가 좋네.
좋은 노래 알려줘서 고마워요.'
그 이후로 Y의 머리 위에 무겁게 드리워져 있던 비구름이 사라졌고 말수도 많아졌다. 학교에서 달리기 하다 넘어진 일을 얘기했고 방과 후 영어 보충수업을 신청해야 할지를 물어봤고, 미술 학원에서 새로 배운 데생 기법을 보여줬다. Y는 영어 독해를 한국어 어순으로 해석하지 않고 영어 어순 그대로 의미가 연결되는 구절 별로 끊어서 속도는 느리지만 정확하게 해석하는 능력을 이미 갖고 있었다. 자신이 단어와 문법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 때문에 영어에 대해 자신감이 부족했다.
고 3인 D군은 5월에 어머님과 함께 온 첫 미팅에서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게 말했다. 중3 때까지 최상위권을 유지했었지만 숙제를 전혀 하지 않아 수학학원 선생님에게 심한 꾸중을 들은 다음 공부를 멀리했다고 했다. 자신은 수업시간에 배운 것만으로도 성적이 나왔기 때문에 숙제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D군 역시 처음 한 달 동안 약속한 시간을 연기하거나 취소하는 일이 많았다. 지갑을 잃어버렸다거나 학교가 늦게 끝난다거나 어머님과 싸워서 기분이 안 좋다는 내용의 문자를 보내왔다.
D군은 수능 영어 시험의 문항마다 문제 푸는 요령이 무엇인지 족집게 학원강사처럼 설명할 수 있었고 해석한 단락의 내용에 포함된 정보에 관심을 보였다. 단순히 문제를 풀기 위해 영어 지문을 해석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 포함된 역사, 지리, 심리학 지식도 함께 배웠다. 모르는 어휘가 없다고 가정한다면 만점도 받을 수 있을 만한 학습능력을 갖고 있었다. 태권도 경연대회에서 입상한 적이 없고 훈련을 게을리해서 관장님과 감정적 마찰이 심했고 입시가 얼마 남지 않아 마음이 급한 어머님과도 부딪치는 경우가 많았지만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높다 보니 행동보다 말이 앞섰다.
Y군과 D군의 학습과정을 한 달 동안 관찰한 다음 학습과 관련된 장점과 단점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었다. 인지 능력은 둘 다 탁월하게 우수하기 때문에 어휘와 문법 지식만 갖추면 성적이 오를 수 있다고 알려 주었다. 그러려면 시간 약속을 지키고 일정 수의 단어를 외우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두 가지를 지키지 않으면 영어수업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알려주었고 이에 동의했다.
물론 그 후 3-4주간 수업을 한 날보다 돌려보낸 날이 더 많았다. 타협은 없다는 걸 분명히 알려 주었고 수업 준비를 해오지 않을 땐 야단을 치는 대신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1) 학습 능력을 상기시켜주고, 잘못된 습관만 고치면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은 실력을 발휘할 잠재력이 있으니 공부를 회피하게 만드는 자신의 (2) 부정적인 감정을 컨트롤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자신들이 원하는 대학생활과 미래 직업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유도했다. 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미래가 구체화되고 (3) 꿈꾸는 미래를 현실로 만들려면 지금 무언가 준비를 해야 한다는 점을 자각하게 된다. 학습 심리에서 이를 elaboration이라 한다. 말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내부의 막연한 생각을 정리하게 되고 이를 실천하려는 의지가 생기게 된다.
습관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잠재력을 객관적으로 인정받으면 아이들은 긍정적인 에너지로 돌아서고 자신을 스스로 조절하려는 내적 동기를 가지게 된다. 좌절도 하고 퇴보하는 순간도 있다. 이럴 때에도 한 번 더 '할 수 있다, 제대로 가고 있다'라고 믿어주면 그 신뢰를 추진력 삼아 방향키는 아이들이 스스로 잡고 나아간다. Y군과 D군처럼 하루하루 조금씩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기쁨을 좀 더 많은 아이들이 느끼며 살아가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