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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상출구 Oct 22. 2022

누가 당신을 완벽하게 만드나요

비로소 갈채를 받는 순간의 <샤인>

그런 영화들이 있다. 하필이면 피곤할 때 보다가 잠들어 버려서 도중에 필름이 끊긴 영화. 이런 영화는 세평이 아무리 좋아도 좀처럼 다시 보게 되지 않는다. 내가 잠든 이유가 왠지 영화가 따분해서이고 이런 영화는 다시 봐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그러고도 매번 ‘보고는 싶은 영화’ 리스트에 올려놓는데 실제로 마저 보기까지는 보통 수년에서 십수 년이 걸린다. 그중 스콧 힉스 감독의 <샤인(Shine)>(1996)을 다시 본 건 20년 만이었다.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서 한밤중에 보다 잠든 게 고등학생 때였다.


<샤인>은 주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교향곡 3번이나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왕벌의 비행’처럼 주인공이 현란하게 연주한 음악과 함께 거론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음악이 온전하게 연주되는 장면은 그리 많지 않다. 어떤 대목에서는 연주 장면을 통째로 생략해버리기도 한다. 그저 감동적인 음악을 들려주거나 멋진 연주 장면만을 보여주려는 영화가 아니라는 듯이.


음악 빼고 음악영화 말하기


흔히 노래든 연주든 음악적 행위가 이야기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화를 ‘음악영화’로 분류한다. 뮤지션을 주인공으로 세운 영화나, 뮤지컬 형식을 빌린 영화는 자연스럽게 음악영화가 된다. 이들 영화는 대체로 ‘건조하고 고된 삶의 출구’로서의 꿈이나, ‘불완전하고 위태로운 삶의 지지대’로서의 사랑을 주제로 삼는다.


뮤지션이 주인공인 음악영화에는 거의 반복되는 장면이 있다. 재능 있지만 소심한 무명가수가 강한 권유에 떠밀리다시피 대중 앞에 나와서는 조심스럽게 노래를 부르다 결국 열창을 하고 찬사를 받는 장면(<이프 온리> <비긴 어게인> <스타 이즈 본> 등)과 은둔 혹은 무명의 연주자가 현란한 연주를 선보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장면(<피아니스트의 전설> <어거스트 러쉬> <말할 수 없는 비밀> 등). 1990년대 후반 이후 영화로 한정하자면 <샤인>은 후자에 관해 원조격이다.


영화 <샤인> 포스터

음악영화는 배우와 세부 설정만 달리 한 채 줄거리가 비슷해지거나 음악적 행위를 부각하기 위해 이야기의 개연성을 희생시키는 경향이 있다. 제작자들은 이를 피하기보다 흥행 요소로 활용하는 듯하다. 우리 역시 음악영화의 서사에는 너그러운 편이다. 줄거리가 좀 부실해도 음악이 좋으면 용서를 해주는 편이랄까. 하지만 평론가들은 서사의 빤함이나 엉성함을 견디지 못하는 탓에 그들과 일반 관객의 별점이 갈리는 경우가 많다.


음악이 장식품처럼 감상용이나 관람용에 머문다면 “음악이 좋다”고는 말할 수 있어도 “좋은 음악영화다”라고까지 말하기는 어렵다. 좋은 음악영화라면 음악이 등장인물의 자아나 삶과 맞물리는 쪽일 것이다. <아마데우스>(1984)나 <파리넬리>(1994), <헤드윅>(2000), <위플래쉬>(2015) 정도를 그런 예로 들 수 있지 않을까. 개봉 당시 많은 관객을 모은 건 아니지만 <샤인>도 국내외에서 대중과 평단 양쪽으로부터 호평을 받은 영화에 속한다. 청각 요소로서의 음악을 빼고 <샤인>을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이 한 편의 음악상자 속에서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아버지라는 감옥


현재 정신질환을 앓는 데이비드 헬프갓(제프리 러시)은 별일 아닌 상황에서도 “난 문제아야” “난 행실이 나빠요”라고 자책하고, 느닷없이 “살아남아야 해”라고 반복적으로 중얼거린다. 우리는 거기에서 깊은 상처를 짐작하게 되는데 그 배경에는 아버지라기보다 훈육관에 가까운 피터(아민 뮬러 스탈)가 있다. 데이비드의 유년시절로 가보자.


2차 세계대전 직후 호주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승부에 강박을 보였다. 경연에 참가한 어린 데이비드(알렉스 라팔로비치)는 무대에 오르며 혼잣말로 “이길 거야. 꼭 우승할 거야”라고 자기 암시를 건다. 연주할 곡이 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그는 정작 자신이 뭘 연주하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나서는 건 아버지 피터다. 그는 청중석에서 벌떡 일어나 곡명을 대신 답하고, 아들의 연주 도중 피아노가 움직이자 무대로 뛰쳐나간다. 데이비드가 연주한 쇼팽의 폴로네이즈도 피터가 고른 곡이었다. 피터는 틈만 나면 데이비드에게 “넌 항상 이겨야 한다”고 주입한다. 추궁하듯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하지?”라고 피터가 물으면 데이비드는 자동응답기처럼 “이겨야 돼요”라고 대답한다.


어린 데이비드가 엄격한 아버지 앞에서 피아노를 연습하는 모습. 영화 <샤인> 스틸컷

피터는 데이비드의 성취를 자신의 성취와 동일시하며 아들(의 재능)에 대해 강한 소유욕을 보인다. 데이비드의 연주에 놀라는 대회 진행자에게 “내 아들이에요. 내 아들”이라며 만족스러워하고, 심사위원이 집으로 찾아와 데이비드에게 건넨 상을 중간에 가로채 자기 호주머니에 넣는다. 어려운 곡을 쳐보겠다는 데이비드를 끌어안으며 “너는 나를 자랑스럽게 만들 거다”라고 다정하게 말하는 모습은 붉은 색감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따뜻하게 보이지 않는다.


데이비드의 수상이나 천재성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기사 스크랩을 보며 흐뭇해하는 피터의 얼굴이 보여주는 건 아들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 자기만족감이다. 거기엔 깊은 열등감이 있었다. 피터는 자신이 어릴 적 아끼던 바이올린을 아버지가 박살 낸 일을 아이들에게 반복적으로 상기시키고, 데이비드에게만 이목이 쏠린 파티에 다녀와서는 아내에게 참가자들이 온통 속물이라고 욕한다.


승리나 생존에 대한 데이비드의 강박은 패배나 약함을 용납하지 못하는 피터의 반응을 통해 더욱 심해졌을 것이다. 데이비드가 우승에 실패한 날 집으로 돌아오는 피터의 발걸음은 한눈에도 성난 사람이다. 그 모습을 보고 큰딸은 데이비드가 우승하지 못했음을 알아채고 “우린 죽었다”고 말한다. 피터는 장기를 두면서 데이비드에게 “넌 질 거야, 질 거야”라고 빈정거리고, 심사위원이 찾아와 건넨 특별상을 “패자에게 주는 상이네요”라고 깎아내린다.


그는 집과 세상 사이에 울타리를 치고 가족을 가둔 교도관이었다. 자신이 최고인 장소(집)에서 사자에게 할퀴었다는 상처를 아이들에게 자랑하듯 보여주고 데이비드에게 자신을 쳐보라며 힘을 과시한다. 피터는 자신을 슈퍼맨에 빗대며 “누구도 날 건드릴 수 없어. 오직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약자는 벌레 취급을 받는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가족을 보호한다며 아내와 아이들을 세상과 단절시키는 모습은 오히려 겁 많은 약자의 태도로 비친다.


해방


피터의 세상에서 데이비드는 거의 채찍질당하는 쪽이었다. 그 채찍질에 연주의 즐거움보다는 연주를 통한 성취에 목을 매게 된다. 피터는 아들을 몰아붙이면서 “어느 누구도 나보다 널 사랑하진 못한다” “(이런 부모를 둔) 넌 행운아다”라고 주장하고 동의를 강요한다. 데이비드의 인생에서 그를 사랑한 사람은 두 부류다. 소유하려 한 이들과 수용한 이들.


소유하려 한 이들은 데이비드의 음악적 재능을 사랑한 경우다. 이들은 데이비드의 패배나 정신장애, 기이한 습관을 용납하지 못한다. 피터가 그랬고, 정신병원에 봉사자로 왔다가 천재 피아니스트로서의 데이비드를 알아본 여성 베릴이 그랬다. 이들은 데이비드를 언제까지고 지켜줄 것처럼 말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피터는 자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학을 떠난 데이비드가 후일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거부했고, 베릴은 갈 곳 없는 데이비드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지만 결국 감당하지 못하고 다른 집으로 보낸다.


정신병원에서 자원봉사자 베릴(오른쪽)과 함께 피아노를 치는 데이비드. 영화 <샤인> 스틸컷

데이비드를 수용한 이들은 그를 한 인간으로서 대한 사람들이다. 10대 시절 사교모임에서 만난 작가 캐더린 여사, 빗길을 헤매던 데이비드를 받아준 레스토랑의 실비아와 그의 친구 질리언. 아버지의 폭정에 억눌린 데이비드(노아 테일러)는 캐더린 여사의 집에서 인간적인 교류를 나누며 안식을 얻는다. 캐더린은 영국 왕립음악학교 장학생 입학 통지서를 받고도 아버지의 반대를 예상해 애초 기대를 접은 데이비드를 격려하며 용기를 북돋워준다. 이미 한 차례 아들의 유학을 가로막은 피터는 껄껄 웃으며 “간다고 하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며 이번에도 반대하지만 데이비드는 처음으로 자신의 선택을 강행한다.


실비아를 만나게 되는 레스토랑 모비(Moby's)는 수십 년간 자취를 감췄던 피아니스트 데이비드가 수면으로 머리를 내민 거대한 고래처럼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장소다. 레스토랑 이름은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Moby Dick)’에서 따오지 않았을까. 영화에서 욕조, 수영장, 바다, 폭우 속 같은 수중환경은 데이비드에게 해방감을 주는 공간으로 묘사된다. 그가 피아노를 치는 푸른 배경의 레스토랑 모비는 햇빛이 반들거리는 물속처럼 보인다. 데이비드는 전과 달리 행복하다. 연주를 마친 뒤에는 갈채를 받으며 사람들과 어울리며 즐거워한다. 승부나 생존에 대한 강박은 이제 없었다.


하루는 아들에 관한 기사를 읽은 피터가 찾아온다. 데이비드는 아버지를 보자마자 사육사 앞에서 겁먹은 동물처럼 움츠린 채 뻣뻣하게 굳어버린다. 하지만 전과는 다르다. 자신이 열지 못하는 캔을 따 보이며 “어떠냐, 정말 쉽지?”라는 아버지에게 “전혀 안 쉬워요”라고 답하고 “(내가 어릴 때 아끼던 바이올린이) 어떻게 됐는지 너도 잘 알지?”라는 질문에는 “몰라요”라고 말한다. 강요된 동의도, 아버지와의 동일시도 거부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데이비드가 아니라 피터가 데이비드를 떠나는데 그 빈자리는 마치 오랫동안 데이비드를 억눌러온 피터의 환영이 다녀간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데이비드는 그렇게 아버지로부터 해방됐다.


완벽한 삶이란


젊은 데이비드는 자신의 의지로 런던 유학을 떠났지만 그러고도 피터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었다. 개봉도 되지 않고 반송되는 편지를 꾸준히 써서 아버지에게 보냈고, 대회에 나가면서 아버지의 희망곡이었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교향곡 3번을 참가곡으로 골랐다. 이 곡은 피터가 어린 데이비드에게 “언젠가 칠 수 있을 거”라며 “너는 나를 자랑스럽게 만들 거다”라고 말한 그 곡이었다. 데이비드는 집을 떠나서도 아버지를 만족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는 혹독한 연습을 거쳐 라흐마니노프 3번을 훌륭하게 연주해내는데, 그런 다음 그의 삶이 완성의 경지에 도달하는가. 오히려 그 반대다. 청중에 인사도 하지 못하고 쓰러진 데이비드는 이후 심각한 정신분열 증세를 보여 정신병원에서 생활하게 된다.


악보가 둥둥 떠 있는 수영장에서 물 위로 얼굴을 내밀고 누운 데이비드. 영화 <샤인> 스틸컷

애초 데이비드와 피터가 좇은 건 음악에 대한 애정이나 열정이 아니라 최고의 자리였다. 완벽을 기대할수록 삶은 불완전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완벽을 기준으로 삼을수록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가 된다. 피터가 완벽을 강요할수록 데이비드는 불완전해졌다. 바라는 모든 것이 이뤄지는 상태를 ‘완벽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완벽은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다. 그렇다면 완벽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 ‘삶이 흔들리는 순간에 지지와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상태’라고.


데이비드는 캐더린과 실비아, 그리고 아내 질리언을 통해 지지와 위로를 받으며 오랜 속박에서 벗어났다. 그의 삶은 라흐마니노프를 성공적으로 연주한 다음이 아니라 자신을 이해해주는 이들을 만난 뒤 비로소 완벽해졌다고 말할 수 있다. 데이비드의 연주는 현란하지만 감동을 주지는 않는다. 영화에서 감동을 주는 대목은 데이비드가 비로소 해방된 채 연주를 마치고 사람들의 갈채를 받는 순간이다. 이때 그의 연주는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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