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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상출구 Oct 26. 2022

당신의 신이 어떠하든

<이웃집에 (망나니) 신이 산다>면 구원을 포기해야 할까

우리 삶은 왜 이 모양인가. 어째서 충만하기보다는 외롭고 빈곤하며, 평화롭기보다는 불안하고 괴로운가. 대다수 무고한 이들의 삶을 훼손하는 차별과 가난과 질병과 기근과 싸움은 왜 끊이지 않는가. 전지전능한 신이 있다면 이럴 수 없다. 그럼에도 정말 신이 있다면 그는 자비로운 존재가 아니라 사디스트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 신이라면 완전무결하다거나 고결한 존재일 리 없다. 신은 불완전한 세상을 만들어놓고 대부분의 확연한 절망 속에 일말의 막연한 희망을 던져놓았을 뿐이다.


벨기에 감독 자코 반 도마엘의 <이웃집에 신이 산다>(2015)는 이런 원망으로부터 상상력을 가동한 영화다. 그러나 신의 존재에 대해 사유하거나 탐구하는, 그런 머리 아픈 작품과는 거리가 멀다. 신에 대한 묘사가 불경스럽기는 해도 신에 대한 믿음에 도전할 생각 따위는 없어 보인다. 영화는 풍자성 동화에 가깝다. 벨기에 브뤼셀의 어느 아파트에 처자식과 살고 있는 신은 원래 지루함을 때우려고 인류에 고통을 가하는 악취미를 가진 망나니다. 이 설정은 어쩌면 “신은 없다고 치자”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운영하는 신으로부터의 구원을 기대한들 그대로 이뤄질 가능성이 희박하니 스스로 희망의 출구를 찾아야 한다, 이런 자각이 영화에 깔려 있다.


망나니 신


괴팍한 중년 남성으로 묘사된 ‘신’이 컴퓨터로 세상에 문제를 일으키며 즐거워하고 있다. 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 스틸컷

중년 남성으로 묘사된 신(베누아 포엘부르데)은 입구도 출구도 없는 집에 틀어박혀 술과 담배를 입에 달고 산다. 가족에게는 더없이 권위적인 가부장이다. 명령하고 윽박지르며 “나한테 복종해”라고 강요한다. 샤워하는 딸을 엿보면서 “아빤데 뭐 어떻냐”고 말하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딸에게 “뭘 봐? 눈 깔아”라고 소리친다. 폭력 휘두르기도 서슴지 않는다. 남편이 무서워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사는 아내에게는 면전에다 대고 “머리에 든 게 야구밖에 없다”며 무시한다. 10살짜리 딸 에아(필리 그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개망나니’에 ‘진상’이 인류를 창조한 신인 것이다.


에아의 아빠는 창조주이지만 제힘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가장이면서 어떤 기적도 일으키지 못하는 신이다. 그는 컴퓨터에 의지해 세상을 만들었다. 원하는 바를 입력하면 그대로 구현되는 식이다. 신은 어두컴컴한 서재에 틀어박혀 담배를 꼬나물고 컴퓨터 자판을 두들겨 인류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 모습은 ‘폐인형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나 다름없다(모든 히키코모리가 폐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가 세상에 일으키는 사건은 화재와 자연재해부터 비행기 추락, 기차 탈선처럼 사람들에게 슬픔과 절망을 주는 것들이다. 이런 비극을 연출하는 데 거창한 이유 따위는 없다. 그저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인류에 고통을 주고 그 모습을 즐긴다. 어느 날 ‘보편짜증유발의 법칙’이라는 것도 만든다. ‘욕조에 들어가기만 하면 전화벨이 울린다’ ‘빵은 꼭 잼을 바른 면이 바닥에 떨어진다’ ‘접시는 꼭 설거지가 끝난 뒤에 깨진다’ ‘마트에서 계산할 땐 항상 옆줄이 더 빠르다’ ‘짜증 나는 상황은 한꺼번에 닥친다’ ….


죽음에 대한 자각


신의 딸 에아가 아빠 서재에 몰래 들어가는 모습. 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 스틸컷

에아는 아빠가 재미 삼아 일으킨 재앙들을 알게 된다. 아빠는 가족과 인류(피조물) 모두에 고통을 주고 있었다. 에아는 아빠에게 복수하고 집을 탈출하기로 한다. 그 복수란 사람들에게 각자 죽기까지 남은 시간을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알려주는 것이었다. 자신이 언제 죽는지 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당장은 절망과 안도가 뒤섞일 것이다. 그리고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불안에 휩싸이다 어느 순간 자포자기하게 되지 않을까. 미국 정신의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사람은 부정(그럴 리 없다)→분노(내가 왜 죽어야 하는가)→타협(조금만 더 살게 해 주신다면)→우울(다 부질없어)→수용(이게 내 인생이구나)의 단계를 거친다고 설명한 바 있다. 영화에서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된 이들은 혼란에 빠진다. 머잖아 세상을 떠날 것 같던 병상의 노인 환자는 12년 넘게 더 살지만 그를 수년간 간병해온 젊은 간호사는 두 달 뒤 죽는다. 장애아들을 둔 여성은 자신이 곧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아들을 먼저 죽이려 하기도 한다.


시한부 인생을 통보받은 뒤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과 남은 삶을 보내는 방식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지만 그 시기를 알지 못한다는 단 하나의 제약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인간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나한테 꼼짝 못하는 거라고. 그래서 하루하루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이 긴장하는 거고. 그런데 죽을 날을 알면 누가 개고생을 하겠어. 하고 싶은 거 다 하지.” ‘수명 유출 사태’ 후 사람들은 죽기 전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막연해서 잊고 살았던 죽음을 현실 문제로 자각하고서야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섰고 ‘버킷리스트’에 담아놓은 것만으로 만족했던 일들을 비로소 실행에 옮긴다. 각자가 어느 시점에 죽는다는 사실은 그대로이지만 그 시점을 ‘아느냐, 모르느냐’ 하나로 삶을 대하는 태도가 뒤집힌 것이다.


평범한 구원


에아가 세상에 나와 만난 이들. 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 스틸컷

생전 처음 거리로 나온 에아는 아빠가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세상을 바꿔보기로 한다. 사도 6명을 모아 새로운 성경을 쓰도록 한다는 게 그의 계획이다. 사도는 어떻게 모집하느냐는 에아에게 오빠 예수는 “네 느낌대로 대충 골라서 아무 기적이나 보여줘”라고 말한다. 이 말은 “사도가 누구든 상관없다”라기보다 “특별한 존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누구나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다)”로 들린다. 예아는 집을 나오기 전 아빠 서재의 무수한 서랍 중 하나에서 인적사항이 적힌 카드 6장을 손에 잡히는 대로 뽑아 든다. 그렇게 낙점된 새 사도들은 누구인가. 사고로 팔을 잃고 웃음이 사라진 젊은 여성 오렐리(로라 베를린덴), 모험가라는 꿈은 온데간데없이 소심한 회사원으로 살아온 중년 남성 장클로드(디디에르 드 넥), 어릴 적 만난 소녀의 경멸 섞인 눈빛에 자신감을 잃고 이성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된 마크(서지 라리비에레),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 없는 보험판매원 프랑수아(프랑수아 다미앵), 유일한 가족인 남편에게 소외당하는 중년 여성 마르틴(카트린 드뇌브), 부모의 과잉보호로 없던 병이 생겨 일찍 죽게 된 마당에 여자로 살기로 한 소년 윌리(로망 젤렝).


에아는 한 사람씩 찾아가고 그들의 이야기는 그대로 각각의 복음서가 된다. ‘오렐리 복음’ ‘장클로드 복음’ 같은 식으로. 왜 ‘복음’인가. 복음은 구원의 소식이다. 그렇다면 6명 각자가 어떻게 구원받는지 보자. 팔 잃은 여자 오렐리는 상실을 수용하고, 중년 회사원 장클로드는 모험을 떠나고, ‘모태솔로’ 마크는 어릴 적 흠모했던 소녀를 우연히 다시 만나 처음으로 이성과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게 된다. 수명 공개 후 직업(보험판매)마저 무의미해진 프랑수아는 뒤를 쫓아가 사랑을 고백할 만큼 설레는 대상을 만나고, 고독한 중년 마르틴은 우리에 갇힌 고릴라에게 위안을 얻고, 여자가 되기로 한 소년 윌리는 더 이상 걱정과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가 아니라 평범한 아이로서 또래 에아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복음서 기록을 맡게 되는 노숙자 빅토르(마르코 로렌지니)는 에아가 새로운 성경을 쓰려 한다고 했을 때 물을 포도주로 바꿀 수 있는지, 물 위를 걸을 수 있는지 따위를 묻는다. 못 한다는 말에 그는 “그러면 쓸 것도 없겠네”라고 시시해한다. 그러나 사도를 고르는 일이 특별한 작업이 아니었듯이 구원도 거창한 게 아니었다.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 크고 작은 어둠이 있고 거기에 빛이 비친다면 그것이 ‘복음(기쁜 소식)’이다, 라고 에아의 구원 여정은 말하고 있다.


기적이 없어도


에아와 그를 따르는 이들이 해변에서 기적이 일어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 스틸컷

에아는 소소하나마 기적을 일으킬 줄 알지만 그 능력으로 직접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는다. 어떤 삶을 살도록 가르치지도, 그들 앞에 놓인 장애를 해치워주지도 않는다. 에아는 사람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원하는 삶을 찾아가도록 안내할 뿐이다. 영화에 여러 번 등장하는 “누가 (신 노릇을) 하더라도 이것보다 낫겠다”라는 대사는 “신이 엉터리다”라는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모두가 누군가에게 (신보다) 도움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하는 것처럼 들린다. 신을 원망하는 것으로 끝낸다면 우리는 고독이나 슬픔이나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우리가 서로에게 희망을 건다면 무엇이라도 해볼 수 있다.


누군가를 돕기 위해 꼭 기적적인 존재가 될 필요는 없다. 관심을 기울이며 지지하고 배려해주는 것으로 힘이 되어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영화 원제 <Le Tout Nouveau Testament>는 직역하면 ‘완전히 새로운 성경’이다. 이 새로운 성경은 서로가 서로를 구원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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