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불임으로 인한 세기말 풍경을 그린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칠드런 오브 맨(Children Of Men)>은 예지적인 데가 있다. 1992년 출간한 P. D. 제임스의 동명 소설을 각색해 2006년 9월 첫선을 보인 이 영화는 21년여 뒤인 2027년 11월 영국을 배경으로 삼으면서 2008년 유행성 독감이 전 세계를 휩쓴 것으로 설정했는데 실제로 비슷한 시기인 2009년 A형 독감인 신종인플루엔자(신종플루)가 유행했다. 영화에서 영국 정부가 이민을 원천 봉쇄하고 난민을 가혹하게 다루는 대목들은 이민자를 적대시하며 반이민 정책을 밀어붙이는 유럽 극우 정권이나 미국 트럼프 행정부를 연상시킨다. 영화 제작 당시는 난민이나 불법 이민자 문제가 지금만큼 주목받던 때가 아니었고 미국 대통령은 조지 W 부시였다. 난민의 생존과 처우 문제가 뜨거운 쟁점으로 부상한 건 중동·북아프리카 지역에서 대규모 이탈이 시작된 2010년 이후다.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장벽을 치고 황폐화한 영화 속 영국의 모습은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를 추진하던 영국 내부의 불안과 혼돈을 미리 반영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쿠아론 감독이 예감(혹은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개봉 후 10년여간 <칠드런 오브 맨>의 시사성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영화가 10년 만인 2016년 9월 한국에 개봉할 수 있었던 것도 그 강화된 시사적 에너지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화가 절묘하게 복제해낸 이 시대의 참상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여기저기서 글자를 오려 붙여 만든 문장을 보면서 글귀는 읽지 않고 글자들의 출처를 논하는 데 그치는 것이나 다름없다. <칠드런 오브 맨>은 현실의 여러 비극과 종교적 상징들을 재료로 완성한 콜라주에 가깝다. 그렇게 구축된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는가.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법’이라고 답할 수 있다. 영화는 자국 우선주의와 이민자 차별, 파멸적 전쟁 같은 부조리를 구체적으로 저격하지만 영화가 갖는 영속적인 힘은 절망적 현실에 대한 자조나 비판을 넘어 희망에 대해 진술한다는 데 있다.
불안과 냉소의 시대
좁은 커피숍 안에서 세계 최연소자의 죽음을 전하는 TV 뉴스를 보는 사람들. 영화 <칠드런 오브 맨> 스틸컷
영화는 (세계 최고령자가 아니라) 세계 최연소자의 죽음을 전하는 뉴스로 시작한다. 사망자는 2009년생 디에고 리카르도. 2027년 11월 16일 현재 18세인 디에고는 사인을 부탁해온 팬에게 침을 뱉었다가 칼을 맞고 숨진다. 뉴스는 디에고의 나이가 18년 4개월 20일 16시간 8분이라고 설명한다. 인류는 디에고가 태어난 2009년 6월 말 이후 18년 넘게 아이를 낳지 못했다. 새 생명이 태어나지 않는 시대에 인류 최연소자는 종의 최후까지 남은 시한을 의미할 것이다. 그래서 디에고는 인류의 희망처럼 떠받들어졌지만 그는 남은 기대수명이 남들보다 조금 더 길 뿐 인류의 구원이 될 수는 없는 존재였다. 구원자의 자격은 마지막까지 남아 최후를 지켜볼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할 사람에게 있다. 사람들이 디에고에게 쏟아부은 애정은 그를 망나니로 만들고 수명까지 단축시켜버렸다. 디에고는 모두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대신 모두가 마지막을 지켜본 인물로 남았다.
희망의 빛이 소멸해버린 세상에서 사람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지 않을까. 불안에 떨며 가짜 희망에 매달리는 쪽과 더 이상 희망은 없다며 냉소적이 돼버리는 쪽. 테오(클라이브 오웬)는 후자다. 그는 한때 반전운동을 벌이던 활동가였지만 지금은 염세주의에 가득 찬 공무원이다. 테오는 디에고 사망 소식을 전하는 TV 뉴스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를 무표정하게 오가고, ‘국민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무실 분위기를 참지 못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조퇴를 신청하면서는 정작 “디에고의 죽음으로 충격이 너무 크다”고 핑계를 대고, 앞서 출근길에 몇 걸음 차이로 폭탄 테러를 모면한 사실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도 하지 않는다. 이런 모습은 세상과 삶에 대한 냉소를 엿보게 한다. 생일에 뭘 했느냐는 오랜 친구 재스퍼(마이클 케인)의 질문에 테오는 “평소처럼 엿 같은 기분으로 일어나 엿 같은 기분으로 출근했다”며 “정말이지 사는 게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아침 출근길 테오(오른쪽)가 지나온 상점에서 갑자기 폭발이 일어나는 장면. 영화 <칠드런 오브 맨> 스틸컷
테오를 비관적 허무주의자로 만든 계기가 아들 딜런의 죽음이었으리라고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테오는 2008년 갓난아기였던 딜런을 독감에 잃었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아내 줄리안(줄리안 무어)과도 결별해야 했다. 헤어지지 않았더라도 이듬해 집단 불임이 시작돼 두 사람은 새로운 아이를 가질 수도 없었을 것이다. 어느 사태도 막지 못하고 주저앉은 테오는 더욱이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을 올려다보며 투쟁가로서의 전의마저 완전히 상실했을 것이다.
불임 치료 연구단체로 알려진 ‘인간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나오자 테오는 말한다. “그런 단체와 설비가 있고 불임이 치료된다 해도 늦었어요. 이미 세상이 다 썩었으니까. 그거 알아요? 불임 사태 이전부터 다 늦었어요.” 이 말은 관객인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 두 가지를 일깨운다. 하나는 인류의 근본 문제는 불임이 아니라는 것, 다른 하나는 절망이 미래(영화 속 현재)가 아니라 오늘의 문제라는 것. 영화의 본론인 희망에 대한 이야기는 가상의 미래가 아닌 지금 우리의 현실에 대한 저 절망적 인식에서부터 시작한다.
구원의 여정
인류 불임 18년 만에 임신한 여성 키. 영화 <칠드런 오브 맨> 스틸컷
테오는 20년 만에 나타난 아내 줄리안의 요청으로 불법체류 여성 키(클레어-홉 애쉬티)를 해안까지 데려다주는 여정을 돕게 된다. 줄리안은 반정부 단체 피시단(Fishes)의 리더였다. 어쩔 수 없이 동행까지 하게 된 테오가 여정의 목적을 알게 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줄리안은 임신 8개월째인 키를 투모로(The Tomorrow)호라는 이름의 의료선에 태워 인간프로젝트에 데려갈 계획이었다. 그런 줄리안이 죽자 키는 테오에게 도움을 청한다. “내 인생도 감당이 안 된다”며 물러서던 테오는 키가 내보인 만삭의 배를 보고 흔들린다. 키의 아기를 정치적 단결과 투쟁 수단으로 생각하는 피시단원들이 키의 거취를 놓고 논쟁을 벌일 때 테오는 “정치적 목적 때문에 이성을 잃었느냐”며 “키에게 필요한 건 의사”라고 말한다.
키의 임신은 인류 불임 18년 만의 기적이지만 테오에게는 인류나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한 여성과 아이의 생명에 관한 문제였다. 20년 전 무기력하게 아이를 잃고 죽은 사람처럼 살아온 그에게 키를 돕는 일은 자기 구원의 길이기도 했을 것이다. 키의 곁을 지키는 미리암이 조산사 시절 목격했던 인류 불임의 징후들을 회상하며 “난 마지막(인류의 최후)을 봤어요”라고 말할 때 테오는 키를 보며 “이제 시작을 보게 될 거예요”라고 말한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키(가운데)의 곁을 지키는 미리암, 이들의 여정을 책임지게 된 테오, 테오의 오랜 친구 재스퍼, 테오의 전 아내 줄리안. 영화 <칠드런 오브 맨> 스틸컷
테오와 키의 여정은 종교적 상징과 설정으로 가득하다. 몇 가지를 볼까. 이름이 ‘Key’로도 들리는 키(Kee)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참조하고 있다. 그가 테오에게 배를 드러내는 헛간은 마리아가 예수를 낳았다는 마구간을 연상시키고, 아이 아빠가 누구냐고 묻는 질문에 키는 “난 처녀(동정녀)예요”라는 농담으로 받아친다. 피시단을 피해 도주하는 테오와 키는 영유아 학살을 계획한 유대왕 헤롯을 피해 애굽(이집트)으로 피신한 요셉과 마리아를 떠올리게 한다. 이 영화가 미국에서 성탄절을 개봉일로 잡은 것은 종교적 의미를 부각하기 위한 전략이었을 것이다.
전직 조산사 미리암은 구약 지도자 모세의 누나 이름을 가져왔다. 모세는 구약에서 예수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애굽 왕이 이스라엘 남자아이들을 죽일 때 모세는 상자에 뉘인 채 강에 띄워졌는데 이를 따라가 지킨 사람이 미리암이었다. 테오 일행이 인간프로젝트행 배를 타기 위해 해안으로 가는 설정은 모세와 이스라엘인들이 홍해로 가는 이야기와도 닮아 있다. 이민자 권리를 위해 싸우는 단체의 이름으로 쓰인 ‘물고기(fish)’는 로마시대 기독교인들이 서로를 확인하는 헬라어 표식이었다.
아기를 감싼 키가 테오의 부축을 받아 군인들 사이로 걸어 나가고 있다. 영화 <칠드런 오브 맨> 스틸컷
키의 아기 앞에서 몸을 숙이고 손을 뻗는 난민들은 구세주를 만난 이들처럼 묘사된다. 총탄을 퍼붓던 정부군과 반군도 일제히 공격을 멈추고 길을 터주는데 일부는 성호를 긋고 무릎을 꿇는다. 이때 흐르는 ‘Fragments of a prayer’(기도의 파편들)를 비롯해 ‘The lamb’(어린양) ‘Mother of God, Here I stand’(성모여 내가 여기 섰사오니) 같은 배경음악은 깊은 절망 속 구원에 대한 갈망을 드러낸다.
주) 영화 제목이면서 원작 소설 제목인 ‘칠드런 오브 맨(Children Of Men)’은 성경에서 ‘사람의 자녀들’ ‘사람의 아들들’ 혹은 ‘사람들’이라고 옮겨지는 말로, 인류(인간)를 의미한다. 대를 이으며 존속하는 인류가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태, 그것이 인류의 종말임을 저 제목은 암시한다.
구원자의 자격
키와 아기, 테오가 탄 배가 안개로 가득한 바다로 나온 장면. 영화 <칠드런 오브 맨> 스틸컷
테오와 키가 조각배를 타고 칠흑 같은 하수도를 관통해 새하얀 바다로 나가는 장면은 출생이나 출산을 비유한 것으로 보인다. 가까스로 태어나듯 도달한 바다는 안개로 자욱해 오히려 방향을 알 수 없다. 누구에게나 세상으로 나오는 길은 하나지만 세상을 살아나가는 방법은 어느 한 가지로 정의할 수 없듯이. 총에 맞은 테오가 마지막 힘으로 노를 저어 나간 바다에서 ‘내일’이라는 이름의 배는 아득한 종소리와 함께 안갯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가 내일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는 듯 영화는 열린 결말을 취하고 있지만 그 끝에 싱그러운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넣은 것은 키와 아이, 그리고 인류의 미래가 어디까지나 희망적으로 상상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구원자는 누구인가. 서로를 살리기 위해 노력한 모든 이들이다. 키를 인간프로젝트에 데려가려다 숨진 줄리안, 죽음을 감수하고 테오 일행을 피신시킨 재스퍼, 키를 보호하려고 군인에게 끌려간 미리암, 테오와 키를 바다로 밀어 보내고 자신은 수용소에 남은 집시, 중상을 입고서도 투모로호를 탈 수 있는 곳까지 키와 아이를 안내한 테오. 이들은 ‘마지막까지 남아 최후를 지켜본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한 사람’, 그러니까 구원자의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과 함께한다면 우리는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간단히 무너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런 사람으로 함께한다면 그들도 더욱 단단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