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미 Nov 19. 2021

탱고, 이름도 나이도 묻지 않아요


탱고에서는 서로의 나이도, 이름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물론 다 같이 논 뒤 술자리에서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면 다들 자연스럽게 알게 되지만, 초면에 서로의 실명과 나이를 묻는 일은 아예 없다고 봐도 된다. 

‘탱고’라는 매개로 서로가 만나고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지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가 이곳에서만큼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탱고를 추는 이들의 인식 저 아래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탱고 수업이 개강하기 일주일 전쯤, 단톡방에서 C와 I와 이야기를 나눴다. 수업에서 쓸 닉네임을 하나 정해오라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여담이지만 나는 아직도 영어 이름이 없다. 영어 이름을 뭘 붙여도 끔찍하게 안 어울리는 이미지라 영어 클래스에서도 외국인 선생에게 꿋꿋이 한국 이름을 말하던 사람이었다.      


탱고 닉네임이라… 구글링으로 찾은 270여 개의 영미권 여성 이름 리스트를 훑어도 ‘이것이 내 이름이오’라고 잡히는 이름이 없었다.     


안나, 올리비아, 에바, 이자벨라, 콜린, 엘린, 애니, 그레이스, 쟈스민, 쥴리아… 


나를 아는 사람들이 들었으면 모두 “네 이름이 그거라고?” 말하며 비웃음을 날릴 만한 이름들뿐이었다. 실명을 쓰기는 싫고, 어쩌면 좋담. 하다가 단순하게 실명을 스페인어로 바꾼 이름이 됐다. 

최소한 “왜 이런 안 어울리는 이름을 써요?”라는 말에 답할 당위성이라도 생기니까.     

하지만 그 이름이 탱고를 추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흔한 이름이라 C와 I는 다른 것을 쓰는 것이 좋겠다고 했지만, 이자벨라가 될 수 없었던 처지였던지라 그냥 그 이름으로 등록을 해버렸다. 


그렇게 나의 또 다른 페르소나, L이 생겼다.  


         

*

퇴근을 하고 홍대에 왔다. 10대 때부터 지금까지 홍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살아온 사람이지만 홍대에 이렇게 춤을 출 수 있는 곳이(클럽을 제외하고) 많은지는 처음 알았다.     


“홍대 지하에는 술집과 댄스홀만 있는 건가?”      


스윙, 살사&바차타, 탱고까지 소셜댄스라는 것을 처음 겪어 보는 내게는 이 모든 것들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춤을 추고 술을 마실 수 있는 바들은 물론 댄스 연습실까지 합치면(간판을 잘 살펴보면 알 수 있다) 홍대입구역 2번 출구 인근은 거의 댄스의 메카 같은 곳이었다.           



*

새 학기 첫날을 기억해보면 참으로 어색하고 뻘쭘했던 기억밖에 없다. 서로 말을 걸까 말까 눈치게임처럼 레이더를 세우는 그런 느낌. 누구와 친해져야 일 년이 또 즐거울까 하던 그 시절의 기억이 근 10여 년 만에 이곳에서 재현됐다. 음악 소리를 따라,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가는 쥐처럼 내려간 곳에서는 몇 명의 사람들이 춤 연습을 하고 있었다. 


신발을 슬리퍼로 갈아신은 뒤 쭈뼛거리며 안쪽 방으로 들어가자 명찰을 나눠 준다.      

“L님이세요? 반가워요~ 명찰은 옷에 달아 주세요”     


의자에 앉아 주변 사람들을 죽 둘러본다. 나이도 다양하고 인원도 꽤 많다. 마른 사람도 키 큰 사람도, 체격 좋은 사람도, 까탈스러워 보이는 사람도, 다행히 또래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불이 꺼지고 탱고의 역사에 관한 짧은 영상을 봤다. 지구 반대편인 아르헨티나에서 탄생한 춤이 어떻게 파리로 갔고, 지금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가. 몇 가지 질문이 이어졌다. 

영화 <여인의 향기>에 나오는 탱고는 콘티넨탈 탱고고, 오늘 내가 시작할 것은 아르헨티나 탱고란다. 그동안 보고 접했던 탱고와 지금 저 두 남녀가 추는 춤은 너무나 달랐다. 시연하던 저분들이 우리를 가르쳐 줄 사람들이란다. 나보다 어린 듯(사실 몇 살 더 많았던)했던 그녀는 남녀 짝을 지어 양 팔뚝을 잡고 걸어 보라 한다.      

아. 5cm도 안 될 굽의 구두는 왜 이리 뒤뚱거리고 다리는 후들거리는지. 탱고는 걷는 춤이라는데 왜 나는 남하고 함께 걷는 게 이리 어려운지. 술을 안 마신 상태에서 생판 처음 보는 남하고 이렇게 가까이, 팔뚝을 잡고 있다니. 아이고 어색해라.     


뭘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게 수업은 휙휙 흘러갔다. 모든 용어는 영어가 아니라 스페인어란다.생소하기 짝이 없다. 네 박자로 이어져 완성되는 박스 스텝. '발도사(Baldosa)'는 스텝과 똑같은 타일이라는 뜻이란다. 

부들거리는 발목과 발목보다 더 흔들리는 멘탈을 붙잡고 연습실 한 바퀴를 돌자 선생님 둘이 “이제 춤을 춘 거에요”라 말한다.    


       

이게 탱고라고요?

갈 길이 먼 취미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하루키와 우드스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