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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소년 Aug 18. 2016

내가 태극기를 거는 이유

언젠가의 8월 15일


 아파트에 걸린 태극기는 한없이 적었다. 이 아파트가 몇 세대로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내 앞에 펼쳐진 고층 아파트 창가에는 고작 4개의 태극기만이 초라하게 덜렁거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날짜를 착각하고 있는 줄만 알았다. 핸드폰을 꺼내 날짜를 확인하니 8월 15일 광복절이었다. 다시 아파트를 바라보았다. 벽돌로 지어진 아파트는 말이 없었다. 고작 4개의 태극기만이 옅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쓸쓸해 보였다.


 2015년 8월 15일 백수였던 나는 광복절이 여느 평일과 다름없었기에 무료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국가를 위해 피를 뿌렸던 독립투사들에 대한 묵념의 시간은 조금도 내어주지 않았다. 그저 마음속으로 "고맙습니다." 들리지 않을 감사의 인사로 모든 것을 대신했다. 내게 광복의 의미는 딱 그 정도였다. 역사에 대해 알고 싶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했다. 그나마 이 날이 공휴일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 1945년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이 날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흙바닥을 피로 물들였다는 사실까지도.


 그 사실을 상기하다가 문득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았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를 위해서 내가 밟고 있는 이 길거리에 피를 흘리며 해방을 외쳤을 당신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고작 백수인 나를 위해서 그렇게 피를 뿌렸을 것이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나를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파트 창가에 걸린 유일한 태극기 하나가 바람에 날렸다. 마치 골목길 끝자락에 수명을 다해가는 가로등 하나가 꿈틀대듯 겨우 빛나고 있는 듯했다.


 집 주변 마트를 전부 들려 겨우 태극기를 하나 구입했다. 주머니에 있던 오천 원짜리 지폐 한 장, 전재산을 털어 태극기를 내 손에 쥐었다. 그 순간 태극기는 내 전부가 되었다. 집에 들러 가방에 카메라를 챙긴 후 태극기를 펼친 채 길을 나섰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만만한 동네 뒷산에 올랐다. 내가 살던 곳의 도심이 한눈에 보이는 곳이었다. 한 시간쯤 땀으로 온몸을 적셔가며 산을 오르자 기막힌 풍경이 펼쳐졌다. 초록빛 우거진 숲과 산으로 둘러싸인 도심이 서서히 햇살을 뒤로하고 각자의 조명을 비추고 있었다. 조명 하나하나 모두 태극기였으면 바랐다. 그랬다면 나는 태극기를 들고 산에 오르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사실 왜 그랬는지 잘 몰랐다. 태극기를 산 이유도, 그 태극기를 짊어지고 산에 오른 이유도 알 수 없었다. 만약 이유가 있다면 갑자기 그러고 싶었다는 것뿐이다. 내 주머니의 전재산을 털어서라도 그 외로운 태극기 옆에 친구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면 사치였을까?

 밤이 되어 태양 대신 달이 세상을 비추기 시작했다. 도심을 바라보면서 오늘 내가 저질렀던 일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역시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나뭇잎 사이로 흐르는 옅은 바람을 느끼며 산 정상에 태극기를 걸었다. 모든 사람의 태극기를 짊어질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내 손에서 한 사람 몫의 태극기는 더 짊어질 수 있었다.

 저 구름 사이로 비추는 달은 깨진 유리조각 하나가 되어 도심의 모든 조명을 밝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나는 언젠가의 8월 15일이면 항상 태극기를 짊어진 채 산에 오를 것이다. 그 산은 꼭 그곳이 모두 훤히 내려다 보이는 곳일 것이다. 그래야 한 명이라도 더 이 태극기를 볼 수 있을테니.

 또 햇살은 저물고 달이 세상을 밝혀주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 태극기를 손에 꼭 쥐고 세상과 인사할 것이다. 그렇게 한 사람 몫의 태극기를 또 내가 짊어질 것이다. 그것이 역사를 모르는 내가 유일하게 그들에게 보답하는 방법일 테니.


 감사하는 내 마음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서서 그들에게 태극기를 바치는 것 뿐이었다.

 적어도 이것이 국경일에 태극기조차 걸지 않는 모든 이들을 대신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애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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