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미 Sep 21. 2022

존재로 스며든 수치심에 대하여.

아이의 성적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어머님과 늘 무기력했던 아이를 만나며.


어제는 수업 후 상담이 길어졌다. 2주 정도 유럽에 다녀와보니 여행 하는 동안 아이들이 수시 1차 원서를 넣는 기간이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수업을 했던 아이 어머님은 처음으로 아이 대학 원서를 넣으셨다는 말을 꺼내셨다. 어머님은 아이 성적으로 갈 수 있는 대학이 변변치 않아 큰 충격을 받으신 듯 하셨다.


어머님은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이 교육에 열과 성을 다하시는 분이셨다. 아이 교육을 위해 이사도 하고, 학부모 대표도 하시고, 아이의 친구 관계에도 아주 깊이 개입하시곤 하셨다. 아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대치동 유명학원에 다녔고, 학원과 과외를 병행하는 살인적인 스케줄을 감내해야 했다. 아이의 학원 스케줄에 따라 어머님의 일상 스케줄도 결정되었다.


아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대치동 유명학원에 다녔고, 학원과 과외를 병행하는 살인적인 스케줄을 감내해야 했다. 아이의 학원 스케줄에 따라 어머님의 일상 스케줄도 결정되었다.



어머님은 아이를 그렇게 열심히 키웠는데 그 정도 대학 밖에 넣지 못한다는 사실이 부끄럽다고 하셨다. 아이가 원서를 넣던 날에는 얘가 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올라서 속병이 났다는 말씀도 하셨다. 아이가 좋은 대학에 못 다니게 될 경우, 이 동네에서 살 수가 없다고 하셨다.


오랫동안 아이를 가르치며 아이를 아주 가까이서 지켜본 나는 어머님께 해드릴 수 있는 말씀이 없었다. 아이의 교육을 위해 이사를 간 것도, 대치동 학원에 다닌 것도, 엄마들 모임을 만들어서 아이의 친구를 관리한 것도, 무엇 하나 아이가 원한 것은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로 자랐다. 아이는 늘 어딘가 무기력했다. 그리고 아이에게 쏟아지는 온갖 인풋에 비해 눈에 띌만한 아웃풋을 내지 못했다. 단 한 번도.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렇게 10대를 보낸 아이에게서 좋은 자아상을 기대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일 것일테니 말이다.



아이는 아마 자신이 누군가의 기대에 충족할 만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는 데서 오는 자괴감을 가지고 살아갈 것이다. 자기 자신을 부끄러워하면서. 스스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며 말이다.


나는 다른 어떤 것보다 아이가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을 가지고 살아갈 것이 걱정되었다. 아이는 다른 누군가에게는 꽤 괜찮은 사람이었을 수 있다. 나쁘지 않은 성적을 받은 성실한 학생이었을 수도 있다. 사회적 지능이 높고 친구들과 무난히 잘 어울리는 아이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이가 가장 중요한 사람에게 받은 평가는 ‘수치스럽고 한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아마 자신이 누군가의 기대에 충족할 만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는 데서 오는 자괴감을 가지고 살아갈 것이다. 자기 자신을 부끄러워하면서. 스스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며 말이다.


물론 수치심 자체는 나쁜 감정이 아니다. 수치심은 우리가 인간임을 깨닫게 하는 동시에 우리가 불완전한 존재라는 건강한 한계를 설정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치심이 한 인간의 정체성이 될 경우 그 이야기는 달라진다. 수치심이 정체성이 될 경우 인간은 자신을 역겨워하고 수치스럽게 여긴다. <수치심의 치유>의 저자 존 브레드쇼에 따르면 이를 '해로운 수치심'이라고 하는데, 이 해로운 수치심은 사람을 거짓되게 만든다. 해로운 수치심을 가진 이들은 평생을 ‘남’이 되길 원하며 살아가거나, 혹은 ‘무가치한 인간’이라는 자신의 신념에 걸맞은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이상적인 인간이 되려는 사람들은 평생을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이들이 숨기고 있는 자신에 대한 비밀은 살아가는 내내 고통을 안겨준다. '무가치한 인간'이 되길 선택한 이들 역시 마찬가지로 고통을 겪을 뿐이다.



 해로운 수치심을 가진 이들은 평생을 ‘남’이 되길 원하며 살아가거나, 혹은 ‘무가치한 인간’이라는 자신의 신념에 걸맞은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좋은 대학에 나오지 않아도 얼마든지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좋은 삶’이라는 것 역시 타인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일 뿐이다. 중요한 건 내가 내 삶을 ‘좋은 삶’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지의 여부다. 내가 나를 받아들이고 중요하게 여기느냐가 좋은 삶을 만드는 핵심 요인이지, 누가 나를 멋져 보인다고, 부럽다고 이야기해야 좋은 삶이 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은 모두가 부러워해도, 모두가 인정하는 자리에 있어도 결국은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스스로를 부족한 사람이라고 여기며 고통을 겪는다. 부디 아이가 조금 더 성숙한 인간이 될 기회를 얻기를, 그리고 자신을 묶고 있는 수치심으로부터 한걸을 더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를 바라본다.




*참고 서적

수치심의 치유(2002), 존 브래드쇼 지음, 한국 기독교 상담 연구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