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육아의 불편한 진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지식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첫 번째는 태어나면서 아는 지식, 두 번째는 배워서 아는 지식, 그리고 세 번째는 곤란이 닥친 뒤에 비로소 깨우치는 지식. 나에게 있어 ‘육아’란 틀림없이 그중 세 번째 지식에 속했다. 물론 그 당시에는 몰랐다. 폭풍 예습이 심지어는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과거 나는 임신 중 그 어떤 예비엄마보다도 열심히 자료를 수집, 정리 프린트하며 엄마가 될 준비를 했었다. 그땐 그렇게 엄마도 예습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며 예정일을 3주나 남긴 어느 날. 갑자기 양수가 터지고 유도 분만에 무통주사까지 맞아가며 하루를 꼬박 버틴 나는 결국 순산에 실패하고 말았다. 사실 돌이켜 생각하면 그토록 힘겹게 순산을 고집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순산하면 아이와 산모 모두에게 좋다고는 하지만 주변의 경험담을 종합해보면 출산 후 순산한 산모가 더 빨리 회복하는 것 외에는 거의 복불복이 아닌가 싶다는 내 생각. 결국 나는 거의 탈진한 상태로 분만실에 실려가 딸아이를 만났고 그것이 나의 첫 예습에 대한 결과였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나 역시 엄마는 처음이었다. 열심히 정리해 프린트해 놓은 자료는 시도 때도 없이 젖 달라며 울어대는 녀석을 달래느라 잊은 지 오래였고 수없이 상상해오던 시뮬레이션 속 ‘천사 아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멘붕이라는 단어를 그때 처음 써 봤던 듯하다. 그렇게 100일을 버티고 나니 비로소 온통 황달로 노랬던 아이는 뽀얗게 탈바꿈하더라. 신생아는 분명 자는 모습만 예쁘다. 초점 없이 한 곳을 응시하던 그 날것의 눈빛은 이제 정확히 엄마를 보고 웃을 수 있게 되었고 얼굴에 떨어진 가재 수건도 온전히 혼자 힘으로 집어 올릴 수 있게 된 그 기적의 100일을 난 잊을 수가 없다. 분명 딸아이는 100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사람의 아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육아던 훈육이던 사실 실전에서 필요한 것은 정보와 지식보다는 소신 있는 판단이다. 인터넷의 바다에서 꼭 내게 필요한 맞춤 정보를 찾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근거 없는 정보는 때론 독이 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권위적인 전문가가 말하는 지식조차도 내 아이의 연령이나 성향과 맞는지 꼼꼼히 살펴 판단하여 조심스럽게 적용하는 것이 맞다.
수유시간은 꼭 3~4시간에 한 번이어야 하는지 수면교육은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시원하게 키워야 한다는데 감기에 걸리면 어쩌나 걱정이고 이유식은 뭐 그리 못 먹는 것들이 많은지. 3개월이면 뒤집고 6개월이면 혼자 앉고 8개월이면 엉금엉금 긴다던데 왜 우리 아이는 아직인지. 밥은 꼭 의자에 앉혀서 먹여야 하는지 젖병과 기저귀는 언제 떼야하는지. 유치원은 몇 살에 보내야 하며 나는 과연 일과 육아를 계속 병행할 수 있을지. 그야말로 난제이다.
그렇게 좌충우돌 8년 워킹맘, 4년 전업맘으로 쉽지 않던 12년 세월이 흘러 나도 이제 사춘기 아이의 학부모가 되었다. 나는 여전히 공부하는 엄마로 늘 책을 가까이한다. 분명 준비된 나의 마음과 지식은 아이의 위험요소를 철저히 배제하여 안전감을 주기도 하였으나 때로는 같은 이유로 아이는 배움의 기회를 잃어가고 있었고. 조급한 부모 마음에 양손에 쥐어 주었던 학습 도구들 때문에 아이는 흥미를 동반하는 자율성을 적절한 시기에 발휘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사실 한 가지, 돌아보면 내가 접한 거의 모든 책에는 분명히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육아와 훈육에 있어서 ‘적절한 시기’와 타고난 ‘아이의 천성’을 고려할 것. 사실 책 속에는 늘 답이 있었다, 아니 답도 있었다. 다만 우린 그냥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을 더 많이 보아왔고 '적절한'따위의 애매모호한 단어는 패스해버렸기 때문에 책 육아에 대한 회의가 드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엄마’란 미리 예습할 수 있는 역할이 아니다. 아이와 엄마는 함께 태어나고 함께 성장한다. 이것이 나의 12년 엄마 경험 중 가장 커다란 깨우침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엄마 인생 12년, 가슴에는 상처라는 훈장도 성장이라는 상패도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어느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최고의 엄마였고 최고의 아이를 키워냈다라고. 그렇게 어느새 아이는 사춘기 문턱에 들어섰고 나는 또 다음 레벨의 문을 열고 들어가 12세 아이의 세상을 관찰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