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적인 감정이란 없다

감정 공부

by 바람꽃


아프다고 말 할 걸 그랬다.


대학에 다닐 때였다. 이미 수년이 지나 정확하지 않은 어린 시절의 기억에 대해서는 들추고 싶지 않지만. 때때로 어떤 기억들은 내가 들추지 않아도 불쑥불쑥 내게 찾아오더라. 마치 미처 하지 못한 말이 남아있는 것처럼.


대학 4학년 나는 이미 성인이었다. 추운 겨울 한 번은 몸살 기운에 이불속에서 으슬으슬 떨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는 거실에서 수차례 헛기침을 하셨다. 아마도 밥때가 되었나보다. 사실 나는 내 아이를 키우기 전까지 '열이 난다'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잘 알지 못했다. 어릴 적부터 체온계를 접해본 적이 없었고 초등학교 6년 내내 한 번도 결석을 한 적이 없을 만큼 나는 내가 건강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를 키워보니 알겠다.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 종종 아프고 열이나며 때론 다치기도 한다. 부모님이 생업에 바빴던 이유로 나는 어릴 적 아파도, 열이 나도 등교를 했던 학생이었던 것이다. 사실 그 당시에는 나와 같은 친구들이 많았다.


나는 그날 내가 열이 난다는 사실조차도 몰랐기에 아버지 헛기침 소리에 꾸역꾸역 방을 기어 나와 저녁밥을 차렸다. 다리는 후들후들 머리는 뜨겁고 눈앞이 어지러웠던 나는 아버지 저녁밥을 차리며 서러운 마음에 몰래 눈물을 훔쳤던 기억이 있다. 대학교 4학년이나 된 나이에 바보처럼 아프다는 말 한마디도 못하고 말이다. 만약 내가 그때 묵묵히 밥을 차리지 않고 아버지에게 몸이 아프니 저녁밥을 직접 차려 드시라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그때의 나는 그렇게 하면 안 되는 줄 알았다.


마음의 준비를 한다는 것


이번에는 나의 딸아이 이야기를 해 보겠다. 딸아이는 어릴때부터 노는 것을 몹시 좋아해서 한번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면 해질 때까지 놀고 마는 성격이었다. 문제는 정말 해가 지고 나서도 좀처럼 집에 가고 싶어 하지 않아서 울고 떼쓰고 화내고를 반복했다는 점. 심지어는 집에 가서도 심통을 부렸다. 나름 배웠다는 나의 감정코칭도 내 아이의 그 순간만큼은 그다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더라. 아무리 달래고 얼르고 위협하고 혼내도 아이는 아주 오랫동안 그랬다. 노는 것을 싫어하는 아이가 어디 있겠냐만은 신기하게도 다른 아이들은 조금 울다가 집으로 향하거나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에는 이미 그런 아이들은 거의 없었다.


지나치면 모자른만 못하다.


그런 이유로 나는 늘 집에 가기 10분 전 아이에게 미리 알려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도왔고. 마찬가지로 그 후 항상 어떤 결과에 대해 다양한 가능성을 대비하도록 이야기해 주는 습관이 생겼다. 아이가 전국대회에 참가했을 때에는 혹시 대회 결과가 나빠 실망할까 봐. 여행 가기 며칠 전에는 만에 하나 이변이 생길까 봐. 그렇게 어느새 나는 흥을 깨는 부모가 되어갔다. 물론 아이가 자람에 따라 기쁨이던 슬픔이던 나 역시 점점 아이 스스로 결과를 받아들이게 기다리는 쪽을 선택했지만, 돌아보면 그 시절 나는 내 아이의 감정을 알아주기 보다 아이의 감정을 컨트롤하는데 집중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만약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달라질까? 나는 과연 적절한 시기에 침묵하여 아이가 스스로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도록 도왔을까? 잘 모르겠다.


감정의 양가성을 허용할 것


마흔이 넘은 지금 나는 여전히 감정이 서툰 어른이다. 슬플 땐 눈물부터 흐르고 화가 날 땐 화를 참기가 어렵다. 감정에 쉽게 압도당하는 나는 평소 눈물도 많다. 좋아도 울고 슬퍼도 운다. 그런 예민한 감수성은 틀림없이 내게 득이 되는 부분도 있지만 대부분 나는 내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양극으로 치닫곤 한다. 아니 다행히 과거형에 가깝다. 적어도 지금의 나는 내 서툰 감정을 인지하고 감정의 양가성, 딜레마, 정서적으로 복잡한 경험들을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경험치가 생겼다. 쉽게 말해, 나는 내 마음속에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담겨있을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사실 이 부분은 약간의 깨달음이 필요한데 감정에 쉽게 압도당하고 서툰 사람들은 대부분 두 가지 양극적 감정이 동시에 담겨 있음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기 때문이다. 슬플 때면 기쁨을 잊고 기쁠 때면 슬픔을 철저하게 배제시켜 두 감정이 공존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미묘한 감정은 단색이 아닌 파스텔톤이다. 결코 한 가지 색이 아닌 모호하게 겹쳐진 부분이 많다. 그리고 그래도 된다. 중요한 건, 그것이 당연하고 그럴 수 있으니 너무 정색하거나 혼란스러워하지 말자는 점이다. 나는 이 간단하고도 복잡한 진리를 마흔이 돼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부정적인 감정이란 없다.


부정적인 감정이란 없다. 감정은 옳고 그른 것이 아닐뿐더러 자로 잰 듯 반드시 슬프거나 기쁜 것이 아닌 복합적인 감정도 있을 수 있다. 아니 복합적인 감정이 더 많을 수도 있다. 아픈 몸을 일으켜 아버지 밥을 차려드리던 대학생 나는 내 감정을 꾹꾹 눌러두며 억울해했고 아이를 키우면서 딸아이가 느낄 수 있는 불안감을 부정적인 감정이라 치부하고 미리 제거해 아이가 가질 수 있는 감정의 경험치를 낮췄다. 아마 지금의 나라면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내 감정을 표현하고 딸아이의 감정 역시 표현할 수 있도록 허용했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공손하게 내 몸 상태를 말씀드렸을 것이며 딸아이가 양극적 감정을 알아채고 스스로 극복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었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감정 공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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