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는 사랑의 누룩이다.”
책을 읽을 때면 본문으로 바로 빠져들고 싶은 마음에 '들어가며', '프롤로그' 등은 한두 줄 읽고 건너뛰는 편입니다. 이 두꺼운 장편 소설의 초입에 적힌 작가의 말도 그러하겠거니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p.13
어릴 적부터 억울한 걸 조금도 못 참던 성격이기도 하거니와… 말대꾸한다고 더 얻어맞는데도 거품 물고 쓰러질 때까지 끝끝내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지요, 내 입장을 해명하기를,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기를,… 차라리 규명하기를 단념하는 선택에 이르기까지는 더 오랜 세월이 걸렸지요
―구병모(2025), 『절창』 , 문학동네
어라? 뭔가 다르게 다가옵니다.
'내가 왜 이 책을 썼으며, 나는 어떤 사람입니다.'를 서술이 아닌 산문형의 짧은 에세이로 시작합니다. 책으로 처음 만나는, 초면인 작가의 글에서, 단 몇 줄만으로 깊은 유대감을 느꼈습니다. 어릴 적 제 모습과 똑같거든요ㅡ실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ㅡ그래서 끊지 않고 모두 읽어 내려갔습니다.
무협 소설과 잘 어울릴 법한 카리스마 있는 구병모 작가의 이름ㅡ사실은 필명이지만ㅡ과 『절창』이라는 제목이 꽤 조화롭습니다. 왠지 남성향 적이며 심오한 이야기겠거니, 으레 상상했습니다.
절창의 첫인상은, 아니 구병모 작가의 첫인상은 '어려운 단어로 미로를 짜는 사람'이었습니다.
p.22
그와 함께 들려오는 말소리는 자음과 모음이 분멸 없이 허공에 던져져 우연한 음절을 이룬 무언가이자 웃음과 신음이 서로의 경계를 망각한 분요紛擾¹의 소리에 가까웠기에, 정체 모를 부흥회에서 강렬한 종교적 경험에 탐닉하는 이의 방언처럼 들리기도 했습니다.
―구병모(2025), 『절창』 , 문학동네
P.24
어쩌면 일은 다음의 예령豫令²을 기다리는 듯한 남자가 진작 다 해놓고 보스는 막타만 날리기 직전인가 했습니다.
―구병모(2025), 『절창』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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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동안 제 어휘력의 민낯을 마주했습니다. 그 정도로 모르는, 알쏭달쏭 한 단어들이 직구로 날아왔습니다. 어느 순간 어휘력 높이기에 딱 좋은 책이라는 것을 캐치하고, 단어장에 단어와 뜻풀이를 적어 가며 때아닌 국어 공부를 했습니다.
이해한 단어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자 내용이 점차 선명해졌습니다. 어려운 단어들도 조금씩 줄어들고요. 생각보다 오래 걸리진 않았습니다. 허들이 높지 않으니 안심하세요. 제 어휘력 때문에 지레 겁먹은 분이 계신 건 아닌지 걱정입니다.
가제본 서평단 체험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책을 읽고, 출판사에 제출하는 양식 외에 추가적인 서평에 대한 의무는 없습니다. 하지만 예약 판매가 끝나고, 정식 출시가 시작될 날만을 기다렸습니다. 『절창』 에 대한 서평을 꼭 남기고 싶었거든요.
P.28
내 귀는 터질 듯 밭아지는 심장 소리로 가득하여 다른 소리가 더 끼어들기에는 비좁았습니다.
―구병모(2025), 『절창』 , 문학동네
P.43
사소한 낱말의 한 음운에 묻은 얼룩을 눈치채고 암시의 질감과 상징의 양감을 파악하게도 됩니다.… 말하기와 듣기, 쓰기와 읽기란…그 행위가 한때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누군가의 영혼이 완전히 부서져버리지 않도록 거드는 법입니다.
―구병모(2025), 『절창』 , 문학동네
P.56
"당연한 게 뭔데요."
당신의 세상에서. 일반의 상식에서. 사회적 합의라는 선에서. 그러게요, 무슨 당연함일까요.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자기가 응시하고 통과해 온 것들 안에서 작동할 텐데요.
―구병모(2025), 『절창』 , 문학동네
P.61
내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수학적 시간이 아닌 나의 조바심이다
―구병모(2025), 『절창』 , 문학동네
P.65-66
사람 사이를 건너서 다가가야 할 때도 있고 채워야 할 때도 있는 한편 그것이 사이임을 모른 채 사이를 두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 사이란 파헤치고 들쑤시는 방식으로만 좁히거나 파악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어쩌면 인간이란 서로의 사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영원한 암실 속에서 서로를 보고 듣고 헤아린다는 착각과 함께 살아가는 유기체적 현상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구병모(2025), 『절창』 , 문학동네
이런 문장들을 보고도 어찌 동요가 없을 수 있단 말입니까. 명문장이 많아 다 열거하기도 어려울 지경입니다.
아무리 모르고 싶어도 그렇게 소중하게 대해주는 것까지 모를 수는 없다고.
절창切創의 사전적 의미는 칼의 날 또는 날처럼 예리한 부분이 있는 물체에 베어 피부의 연속성이 끊어진 상처를 말합니다. (출처-국립국어원)
상처는 외부의 자극으로 인해 발생하는 흔적이며, 고통을 수반합니다. 소설은 커다란 상흔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기괴하고 엽기적인 이야기로만 느껴지던 도입부를 지나, 미스터리한 협곡을 따라 걸으니, 저마다의 생채기와 생채기의 사연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 과정은 치유가 될 수도, 진한 흉터로 남을 수도 있겠습니다. 상처를 준 이에게 되갚을 수도, 용서할 수도 있겠지요. 그것은 오로지 상처를 받은 사람만이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은 단지 '재미있다'라고 표현하고 싶지 않습니다. (결말이 조금 아쉽기도 합니다.)
이전에 정해연 작가의 『홍학의 자리』 는 절대 영화로 나와선 안 된다고 했었는데, 『절창』 은 꼭 영화화되어야 합니다. 구병모 작가 특유의 유려하고 생동감 있는 문체에 어느새 소설 속 한 장면에 함께 머무르고, 숨죽이게 됩니다. 생명력이 요동칩니다. 반전을 좋아하고, 소설을 사랑하는 모든 애독가들에게 바칩니다.
P.165
애초에 책을 읽는다는 것은 샛길로 빠져서 미지의 숲을 거닐다 때로는 기꺼이 길을 잃는 일
―구병모(2025), 『절창』 , 문학동네
저 역시 기꺼이 길을 잃었습니다.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이 미지의 숲을 찾아 또다시 첫 페이지를 펼칩니다.
*각 인용문은 사전 서평단용 책자에서 발췌한 것이므로, 페이지가 다를 수 있습니다.
¹ 분요紛擾:어수선하고 소란스러움.(출처-네이버 국어사전)
² 예령豫令:구령(口令)의 처음 부분. 어떤 동작인가를 알려 그 동작을 미리 준비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앞으로가’, ‘열중쉬어’에서 ‘앞으로’, ‘열중’과 같은 것을 이른다.(출처-네이버 국어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