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 계신교. 지 왔니더.”
“오야~ 민석이가.”
“예. 여그 젊은 아 지내러 왔지예?”
“오야, 와, 아는 사이가?”
“뭐…. 우예 알게 된 사인데, 오늘 시내 좀 가기로 해가 데리러 온기라예.”
“맞나? 아직 안 인났을 낀데, 여 쪼매 앉아 있그라.”
“아야~ 인났나?”
점점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에 눈이 번뜩 떠졌다. 어젯밤 방에 들어온 기억까지는 있는데, 들어선 순간 까무룩 잠이 든 모양이다.
“네…. 네! 잠시만요.”
해주는 곧장 화장실로 가 고양이 세수를 하며 얼굴 이곳저곳을 살핀다. 거울에 비친 꼴을 보니 바닷가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해초 더미가 따로 없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양해를 구하고 급히 샤워기 물을 튼다. 물에 빠졌던 그대로 잔 탓에 단단히 엉겨 붙은 바닷물이 하얀 가루가 되어 머리에서 후드득 떨어졌다. 해주의 눈에서도 고장 난 마음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샤워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물줄기가 굳은 몸과 마음도 조금씩 녹여냈다. 뭉게뭉게 김이 피어나 어제의 애환을 지워내는 듯했다. 실패에 대한 좌절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이런 자신이 한없이 보잘것없었다. 무엇이 해주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몰라도 분명한 감정의 변화가 일었다. 스스로가 못나 보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개운하게 씻고 나와 머리카락을 훌훌 털며, 가방 속 아무렇게나 넣어두었던 옷을 꺼낸다. 오늘따라 더욱 선명해 보이는 구김에 물을 묻혀 펴내려 하지만, 더 지체할 시간이 없다. 문을 열고 나가자, 어제 해주를 살린 널따란 등이 밝은 햇살을 맞으며 반긴다. 그대로 뛰어가 안기고 싶은 충동이 밀물처럼 차올랐다. 그러나 그는 그저 눈앞에 죽어가는 사람을 살린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란히 철문을 나섰다. 민석이 할머니에게 어제 일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것 같아 내심 고마웠지만, 그 말은 목구멍 안에서만 맴돌았다. 해주에게는 그 한마디가 자신을 내어주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대문 앞에는 연식이 오래된 검은색 차가 서 있었다. 민석이 조수석 문을 열어주자, 해주는 가만히 속도에 맞춰 차에 올랐다.
“잠은…. 오드나?”
“응…. 어젠 미안.”
“아이다, 이래 멀쩡해가 다행이지. 속은 우얄지 모르지만. 일단 가자. 알겠제?”
“응.”
조금 큰 곳에 갈 요량인지, 많은 신호를 지났다. 시답잖은 이야기라도 주고받을 법했으나,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 모두 아무 말이 없었다. 부지가 큰 대학병원이다. 병원 안은 많은 사람으로 붐볐지만, 대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민석은 보호자인 양 진료실 문을 먼저 열고 들어가 앉았다. 자극적인 단어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이 친구가 어젯밤 산책 중 발을 헛디뎌 물에 빠졌으며, 자신이 급히 발견해 CPR로 응급처치했음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했다. 해주는 자신의 행동이 탄로 날까 싶어 마른 목에 침을 꼴깍 삼켰다. 다행히 의사는 큰 동요 없이 해주의 상태를 이리저리 살폈다.
“37.1도. 코와 목이 좀 붓고, 맑은 코가 보이네요. 초기 감기 증상이에요. 요즘 같은 날씨에 밤바다 산책은 위험하니 절대 하지 마시고요. 이분 없었으면 어쩔뻔했습니까…. 당분간은 약 먹고 푹 쉬세요. 물 많이 드시고요.”
원한다면 피검사를 받아볼 수도 있겠지만, 외관상 큰 문제는 없어 보이니 감기에 대해 처방을 해주겠다는 말로 간단히 마무리되었다. 간밤의 해프닝처럼. 별일 아니었던 것처럼. 문을 나서며 민석을 흘끗 보고 머리를 긁적이자, 민석은 그런 해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행이네.”
갑작스러운 터치에 화들짝 놀란 해주를 본 민석은 피식 웃어 보였다. 그는 약국에서까지 보호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해주가 나서기 전에 민석이 앞서 모든 일을 대신했다. 해주는 이런 호의가 처음이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조차 몰라 그대로 굳어 있다. 민석이 좋은 사람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이 감정이 무엇인지는 혼란스러웠다. 고마움인지 아니면 그 이상인지 해주 자신도 헷갈렸다. 이렇게 갑자기 좋아질 수 있다고? 이번엔 분명 뇌나 심장이 고장 난 모양이다.
“많이 기다렸제. 이제 가자.”
“어디를?”
“어디긴. 밥 묵고 커피 한잔하고 그라는 기제. 뭐 하고 싶은 거라도 있나.”
“아, 아니 그건 아니고….”
“온나! 밥 무러 가자.”
차는 해안가를 따라 시원하게 달렸다. 옆에서 본 민석은 편안해 보였다. 항상 불안하고 예민한 해주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 그런 면이 부럽기도 한 한편 궁금했다.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다른 이에게 이토록 호의적일 수 있는지. 자신에게 득 될 것 하나 없는 상황에도 선뜻 나설 수 있는 건지. 또, 어떻게 이렇게까지 여유로울 수 있는지. 해주에게 민석은 처음 느껴보는 호기심이 되었다.
‘꼬르륵’
“배고프나? 하하. 참, 진항엔 언제 왔는데.”
“일주일 조금 안 됐지…?”
“어데 구경은 좀 했고?”
“아니…. 그냥 알다시피 위판장 나가고…. 민박집 앞 바다 좀 보고…. 그랬어.”
“죽으러 온기가.”
“….”
“아무리 그런 생각으로 왔어도, 이제 살려준 사람 생각해서 잘 살아야한다. 알았나.”
“할 말이 없네….”
“개안타. 살다보마 힘든 일도 있고, 죽고 싶기도 하고, 그럴 수 있제. 이제라도 다시 살믄 된다. 내랑 진항 구경 다닐래? 여 볼데가 참 많그든. 여 사는 내도 아직 다 못봤다.”
“괜히 나때문에 마음 쓸 거 없어…. 배려는 이만큼도 충분해….”
“배려? 어느 반푼이가 배려를 이래 하노. 그런 거 아이다. 어디 불안해가 니를 혼자 둘 수나 있겠나. 이전처럼 아침엔 일하고, 그 후엔 내랑 놀아도. 니가 내랑 놀아주모 되는 거 아이가.”
식당 앞에 정차한 후에도 한동안 대화가 이어졌다. 해주의 호기심과 호감만큼 민석도 그러하다는 걸 그의 눈빛으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민석을 거절할 수 없을 만큼 해주의 마음은 이미 커져 버린 후였다. 그를 곁에서 계속 볼 수 있다는 사실이 해주의 가슴을 뛰게 했고, 온몸의 신경이 아지랑이처럼 간지럽게 피어올랐다.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 돌아온 민박집에는 아무렇게나 벗어둔 해주의 옷들이 빨랫줄에 가지런히 널어져 있다.
“어데 다녀왔나?”
“병원이랑 여기저기 좀요.”
“맞나. 밥은 우야고?”
“먹고 왔어요. 저 근데 빨래….”
“어, 내꺼 하면서 한기다. 신경 쓰지 마라. 어여 드가고, 내일 내랑 어디 좀 갈 수 있나?”
“어디를요…?”
“내일 장 서는 날인데, 은행 일도 봐야 허고…. 시장 구경시켜주꾸마.”
“아, 네. 좋아요.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오야. 드가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