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충류에게 말 걸기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은 언제나 숙제다. 나는 업무 특성상 대부분의 시간을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데 사용한다. 새로운 업무를 협의하고 친한 동료와 농담을 나누고 때로는 낯선 사람을 평가하는 자리에 들어가기도 한다. 마음이 편한 사람도 있고 아직은 마음이 열리지 않은 사람도 존재한다. 생각을 알기 어려운 사람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힘들다. 타인에게 마음이 긁히기도 하고 때로는 별거 아닌 배려에 마음이 풀리기도 한다. 이번 글에서는 마음에 굳은살을 직접 키워가며 배운 몇 가지 커뮤니케이션 방법들을 공유하고자 한다. 때로는 이 방법들이 엑셀이나 피그마를 잘하는 것보다 회사에서 나를 더 지켜주는 갑옷이 될지도 모른다. 닿고 싶은 타인이 있지만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을 때 꺼내 읽기를 바라며.
회사 생활을 막 시작하던 시절 첫 선임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회사 생활을 잘하기 위해서는 두괄식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당시 요령이 없던 나는 밤새 만든 디자인 시안을 선임에게 가져가 결론을 우회하며 시시콜콜한 것까지 설명했다. 한참을 듣던 상사는 "그래서 요점이 뭐야"라고 따갑게 말했다. 노력을 보여주고 싶었던 나는 큰 실망감만 남았다.
두괄식은 핵심이나 결론을 앞에 놓고, 이유와 근거를 풀어가는 형식이다. 두괄식을 잘 쓰는 사람들을 보면 얼핏 냉정하게 보이는 경향도 있다. 단도직입적인 이미지를 풍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다양한 사람들을 매니징 하는 입장이 되어보니 어느새 나는 두괄식의 수호자가 되어있었다.
두괄식 문장을 즐겨 쓰던 동료가 있었다. 호리호리하고 눈매가 매서워서 사실 초반에는 그렇게 친하지 않았다. 하지만 업무차 만날 때마다 깊은 인상을 주었다. 미팅 30분 전 요약된 내용이 담긴 링크를 미리 보냈고, 나는 미팅에 쉽게 집중할 수 있었다. 미팅 중에도 그는 대부분의 말을 두괄식으로 마감했다. 이유와 근거는 필요할 때만 덧붙였다. 미팅 후 중요한 키워드들만을 기록해 한두 시간 뒤 아까 링크에 내용을 얹어 보내주었다. 문장들도 매우 짧았던 기억이 난다.
당시는 알지 못했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동료가 했던 다양한 행동들은 하나의 메시지로 다가온다. "두괄식은 타인의 시간을 아끼려는 마음이다."
발화란 언어를 음성으로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어째서 침묵이 발화라는 걸까?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은 타인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말하기보다 듣기의 비중을 늘리라고 한다. 설득을 위한 좋은 대화의 비율은 3:7이다. 3이 말하기다. 왜 말하기 비율을 줄이면 좋을까.
듣기 비율을 늘리면 생각할 시간이 많아진다. 말실수를 할 가능성이 낮아진다. 더불어 대화의 지분을 많이 가진 사람은 속으로 "이 사람이 내 대화에 경청하고 있구나"라는 마음이 자연스레 들게 된다. 이는 곧 상대에 대한 호감으로 연결된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 내용과 함께 이 사람이 진짜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에 주목하는 것도 커뮤니케이션에 도움이 된다. 내용과 별개로 상대의 표정이 오늘 너무 안 좋거나 "진짜", "정말" 같은 부사를 무의식적으로 계속 사용하고 있을 수 있다. 대상의 마음이 지쳐있거나, 이해받고 싶은 상태일 수 있다. 이럴 때는 무조건 논리적으로 커뮤니케이션에 임하는 것이 크게 도움 되지 않는다.
일본의 디자이너 하라 켄야는 <디자인의 디자인>에서 공백은 텅 빔이 아닌 무엇이든 생길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말했다. 시각적 비움이 미학적 지위를 얻자 네거티브 영역이 가지는 전통적 의미가 전복된 것이다. 대화에서의 침묵은 어떨까?
미국의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연설을 잘하기로 유명하다. 그중 애리조나주 총기난사 사건 희생자 추모식은 그의 연설 중에서도 최고로 손꼽힌다. 놀랍게도 이 연설의 대부분은 침묵에 해당한다. 연설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가 크리스티나가 꿈꾸던 것과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어린이들이 바라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후 오바마는 말을 멈췄다. 그리고 긴 침묵이 흘렀다. 10초 뒤 오른편 사람들을 보고, 20초 뒤 길게 숨을 내쉬었다. 총 51초의 버티기 힘든 침묵이 흘렀고 다시 연설을 이어갔다. 오바마의 긴 침묵 속에는 언어로는 닿기 힘든 복잡 미묘한 감정들이 담겨 있었다. 사람들은 오바마의 긴 침묵 속에서 저마다의 메시지를 찾았을 것이다. 침묵은 말하기의 상대적 개념이 아니다.
우리는 적, 성, 화가 붙은 접미사를 좋아한다. 수치적, 유연성, 현대화등이 여기 해당한다. 접미사를 자주 사용하는 사람을 보면 권위가 느껴진다. 똑똑해 보이면 좋은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는 좋지 못한 커뮤니케이션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대화를 듣고 있는 사람이 배려받는다는 느낌을 받기 힘들기 때문이다. 적, 성, 화는 전문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에 유혹적이지만 멀리 두면 좋은 언어 습관 중 하나다.
인간의 뇌는 다양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진화 과정에 따라 각각 형성된 시기가 다르다. 우리가 하루 동안 내리는 무의식적 의사 결정 대부분은 이중 가장 먼저 생성되고 오래된 '파충류의 뇌'가 맡고 있다. R-영역이라고도 불리는 이 부분은 생존과 관련된 행동과 직관적 사고를 수행한다.
R-영역이 내리는 결정은 노력이 필요 없고 빠르다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특징은 뇌의 편애로 이어진다. 뇌는 효율을 지독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리처드 탈러의 저서 '넛지'에는 파충류의 뇌 정반대에 해당하는 숙고 시스템 이야기가 등장한다. 숙고 시스템은 우리가 복잡한 수학 공식을 풀거나 금융업무를 볼 때 만날 수 있다. 즉, 우리가 의식을 해야 뇌에서 겨우 불러낼 수 있는 존재다. 이러한 특성을 보고 심리학자들은 뇌를 인지적 구두쇠(Cognitive Miser)라고 부른다.
마이크로소프트에 따르면 2000년 12초였던 인간의 평균 집중력 지속 시간이 2013년 8초로 줄었다. 이는 스마트폰 사용과 관계가 있다. 갈수록 낮아지는 인간의 집중력 지속 시간은 숙고 시스템 대신 R-영역을 더 자주 호출할 것이다. 우리의 하루 대부분은 파충류에게 말을 걸고 있을지 모른다. 타인의 대부분은 직관적이고 무의식적이며 결정에 많은 노력을 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항상 상기하자. 이들에게는 더 짧고 효율적이며 무엇보다 쉬운 말하기 방식이 필요하다.
논리가 언제나 좋은 커뮤니케이션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똑똑하지만 타인의 자존심을 떨어뜨리는 사람이 있었다. 논리 정연하지만 사람들은 그와 대화를 나누는 걸 극도로 기피했다. 배려 없이 전달되는 논리는 마음의 스팸함에 도착하기 때문이다. 이때 좋은 장치가 하나 있다. 곧바로 차가운 논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는 자원을 활용해 심리적 쿠셔닝을 만드는 것이다. 이를 '감정 쿠션'이라고 한다. 상대에 대해 미리 알고 있는 정보가 있다면 효과적이다.
'데이빗, 오늘 향수는 어제랑은 다른데 또 다른 매력이 있네요'
'케이티, 식단을 단백질 위주로 바꾼 지 꽤 되셨는데 효과가 어때요?'
'타일러가 지난주 빌려주신 책에 이런 구절이 무척 인상 깊었어요'
만약 사전 정보가 없다면 오늘 상대가 입은 옷의 컬러나 날씨 등도 유대감의 자원이 될 수 있다. 대화에 일정량의 감정 쿠션이 생기면 내 말들이 스팸함으로는 잘 가지 않는다. 그러니 이러한 유대감을 위한 자원들을 아끼지 말자. 타인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에게 의외로 마음을 쉽게 연다.
'커뮤니케이션이 어려울 때 꺼내 읽기 좋은 이야기'(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