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nce a week Nov 01. 2018

함께 달리실래요?

알렉산드라 헤민슬리 <러닝 라이크 어 걸>

늦여름부터 늦가을까지, 여전히 달리고 있다. 


처음 시작할 때만큼 열정적인 것은 아니지만,(처음 달릴 때의 이야기는 요기에) 시간이 나면 운동화를 신고 머리를 질끈 묶고 나간다. 달리기를 시작한지 고작 두달이 조금 넘은 기간이었지만, 한동안은 지루하기도 했다. 나는 여럿이서 뛰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다양한 러닝 코스를 달린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거의 집 앞의 호수를, 혼자 노래를 들으며 뛰는게 전부였고 조금 멀리 나가면 한강 정도였다. 혼자 달린 기록들을 가끔 SNS에 올렸고 어느 날 친구가 이 책을 빌려줬다. 이 책을 읽으며 다시 달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러닝 라이크 어 걸(Running like a girl)> 이란 책은 뛰기는 커녕 운동조차 싫어한 한 여자가 마라톤 풀 코스를 뛰게 된 이야기다. 아주 빼어난 운동신경을 가진 것도 아니고, 뭐 열심히 뛰어서 어디 레이스에서 수상했다는 성공 스토리도 아니다. 그냥 그녀가 달리면서 느낀 것들을 적은 에세이집인데, 달리기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된 나에게도 격하게 공감되는 부분도 있었고, 마침 달리기에 대한 즐거움이 권태로워질 때 쯤에 읽게되어 다시금 동기부여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드디어! 러닝화를 샀다! 돈을 썼으니 또 달린다!)


달리기를 시작하게 된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마침 날이 선선해졌고 머릿 속에는 잡생각이 너무 많았다. 달리면 아무 생각이 안나니까 그냥 달렸다. 처음에는 1-2키로를 뛰는 것도 버거웠다. 호수 한바퀴에 2.6키로 정도인데 혹시 호수 벤치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쟤는 반 바퀴조차 제대로 못뛰네" 라고 생각할까봐 신경이 쓰이기도 했다. 그러다 처음으로 한 바퀴를 온전히 뛰게 됐고, 어느 날은 두 바퀴를, 어느 날은 한강의 여러 대교를 지나갔다. 마침 달리기를 하는 친구들이 있어서 함께 10km 마라톤에 나가기도 했다. 달린다고 내 삶이 갑자기 바뀌지는 않았다. 갑자기 체력이 좋아지지도 않았고, 마음이 평온해지지도 않았고, 세상이 행복하게 보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달리기라는 취미를 갖게 된 것은 정말 좋다. 



첫 마라톤 이후의 달리기 기록들. 미세하게나마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



첫 번째로는 그냥 달리는게 좋기 때문이다.


나는 달리기를 하면서 세상이 더 작게 느껴졌고 내 두발로 갈 수 있는 영역이 늘어났다는 것이 좋았다.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의 오니쪽에서 성큼성큼 올라갈 수 있다는 것, 일정한 호흡과 힘찬 다리로 원하는 곳이 어디건 더 빨리 쉽게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나만의 내밀한 기쁨이 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가끔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궁금해하고 질문하는 걸 상상하곤 하는데,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결정을 했기 때문이다. 달리기는 나 자신을 그저 좀 괜찮은 사람으로 느끼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인생에서 내가 조금 더 자유롭게 원하는 더 많은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해주었다.


온 몸을 이렇게 움직여서 숨이 찰 때까지 뛰는 경험을 한 것이 언제였을까. 회사에 지각했을 때나 약속에 늦었을 때 정도..? 오로지 달리기위해서 나의 의지로 달리는 것 자체가 재밌다. 책에서 말하듯 일정한 호흡과 힘찬 다리로 원하는 곳이 어디건 빨리갈 수 있다는 것! 


두 번째로는 계절의 변화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달리기와 다시 사랑에 빠졌다기보다 브라이턴과 깊은 사랑에 빠지고 있었다. 어른이 되어 처음으로 어떤 도시를 선택해 살게 되었고, 나 자신이 그 도시의 일부가 되었고, 그것은 곧 내 정체성의 일부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내 다리는 충실히 한 발 한 발 내디디면서 예전의 리듬을 찾아가고 있었다. 사실 나는 이 새로운 연애에 정신이 팔려 그 사실을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었다. 지루한 의무가 될 뻔했던 일이 내가 사는 곳에 대해 하나하나 알아가는 행복한 명상의 계기가 된 것이었다. 


늦여름 밤에 시작한 달리기는 어느 덧 가을을 지나 겨울의 문턱까지 왔다. 처음에는 땀이 주룩주룩 날만큼 더웠지만, 어느 덧 공기가 선선해짐을 느꼈고, 바닥에 은행이 한가득 떨어져있던 날도 있었다. 은행 냄새가 지독했었다. 그리고 요즘엔 아침에 뛰면 차가운 것을 갑자기 먹은 것처럼 머리가 딱딱-아플 정도로 온도가 내려간 걸 알게되고, 뛰다가 후드집업을 벗지 않아도 될만큼 추워진 것도 알게된다. 은행은 모두 없어지고 바스락거리는 낙엽이 떨어졌다가 이젠 그마저도 없는 겨울이 오고있다. 저자는 영국인이라 좀 더 브라이턴이라는 도시와 사랑에 빠진 것 같은데, 나는 도시와 사랑에 빠진 정도는 아니지만....! 확실히 동네의 많은 풍경이 들어온다.


세 번째로는 아빠와 유대감이 생긴 것이다.


갑자기 우리에게 소통의 방법이 생겼고, 그로부터 몇 주 동안 비밀 암호 같은 대화가 이어졌다. 가끔은 달리기 훈련에 대해 새로 얘기할 거리가 떨어지기도 했지만, 꼭 그 주제가 아니어도 우리의 공통된 관심사로 얼마든지 대화를 이어갈 수 있게 되웠다. 이제 '우리끼리 아는 일'이 많아졌다. 이 다리는 아빠의 다리였다. 내가 힘차게 언덕을 올라갈 수 있게 하는 이 폐는 아빠의 폐였다. 그리고 달리기라는 것이 물론 힘들지만 분명 그만한 가치가 있음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성정 또한 아빠의 것이었다. 그것은 가장 괴로운 훈련의 순간에도 나를 견뎌낼 수 있게 해주었다.


아빠는 저자의 아빠처럼 마라톤을 완주한 사람은 아니다. 그치만 종종 새벽에 호수를 뛰시긴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 전 아침에 뛰려고 하는데 아빠가 문 앞에서 내가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같이 뛰자고! 아빠랑 뭔가를 둘이 함께 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상상도 못했었는데, 내가 아빠보다 더 오래, 잘 달릴 수 있는 거다. 아 시간이 이렇게 흐르고, 늘 버팀목 같던 아빠의 세월도 이렇게 흘렀구나, 조금은 마음이 서글퍼지기도 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실제로 건강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연애와 일로 다치고 상처받았던 내 자존감은 감정의 보톡스라도 맞은 것처럼 되살아났다. 내 안에서 부풀어 오르는 감정은 최근 몇 년간 느껴본 중 가장 달콤했다. 자주 바깥으로 뛰어다님으로써 나는 그만큼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 세상 안에 내 자리가 더 커졌다는 것을 느꼈다. 후회스럽거나 안 좋았던 일도 비극이나 재앙이 아니라 조수처럼 밀려갔다 밀려오는 삶의 이치로 느끼게 되었다.


그해 가을 감정의 극단을 경험한 끝에 나는 내 느낌이 결국 옳았음을 깨달았다. 일단은 계속 달려야 했다. 러너가 될거라고 결심한 것처럼 계속 달리다보면 더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면 됐다. 두 경우 모두 훈련보다는 마음이 얼마나 회복 탄력성을 가지게 되었느냐가 훨씬 중요했다. 이제 나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테이블에 둘러앉아 내가 거둔 결실을 맛보았다. 나는 다리 근육만 단련한 것이 아니라 두뇌를 단련하는 법도 배웠다. 이 둘은 서로 반복하지 않고 협력했다. 




마음의 회복 탄력성


일단 달리다보면 감정이 스르르 지나감을 느낀다. 처음에는 온갖 생각이 들다가도, 이내 달리는 것 밖에는 생각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땀을 흘리며 달리고, 집에 와서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놓고 좋아하는 향의 바디 오일로 다리를 마사지하는 그 기분은 정말 좋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주로 술로 풀었었는데, 달리기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다는게 신기하다. (물론 술도 여전히 많이 즐겨 마신다!)


달리기란 숙취와 정반대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술을 마실 때 느끼는 황홀과 마법과 흥분의 지속 시간은 무척 짧다. 딱 좋을 정도의 취기는 1시간 정도 이어지고, 아주 길어야 3시간 정도면 끝난다. 그러다가 곧 속이 불편해지고 메스꺼워지면서 그 상태가 지겨워서 빨리 깨고 싶어진다. 끔찍한 숙취는 또 어떤가. 고작 몇 시간 흥청망청 즐겼다는 이유로 다음 날 하루 종일, 혹은 이틀까지도 괴로움이 이어진다. 달리기는 그 반대다. 달리면서 느끼는 고통은 짧지만 그로 인해 좋은 컨디션이 유지되는 시간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길다. 내게서 빛이 나는 것 같다. 나 자신이 천하무적으로 느껴진다. 이 정도면 다시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끔찍한 숙취가 진짜 괴롭기는한데, 3시간 정도의 황홀을.. 아직까지는 놓칠 수가 없다...)


혼자 달리는 것이라 문득 외롭기는한데, 그래도 혼자 각자 달리는 언니/친구/동생들이 있다. 그들과 러닝 기록을 공유하고 서로 독려하기도 한다. 그들의 기록이 쑥쑥~ 좋아지는 걸 보면서 진심으로 응원해주고, 나도 다시 자극을 받아 또 달리기도 한다. 가끔 마라톤 대회에서 만나서, 함께 달리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달리기에 대해 말하는 시간은 즐겁다. 그렇게 보낸 주말 하루는 풍성하다. 몸도 마음도.


몸이 변하면서 내 몸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내 관점도 바뀌기 시작했다. 내 안의 남성적인 면이 발달하기 시작했고, 치열한 면도 약간은 생겼다. 새로 얻은 자신감은 여자 친구들과의 관계에도 자연스레 적용되었다. 그들에게 존중받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계획을 세웠으면 반드시 지켰고 시작을 했으면 끝까지 해냈다. 나는 내 안의 남성적인 면을 껴안으면서 더 나은 여성이 되어갔다. 그럼으로써 내게 목표와 꿈이 있고 그것을 성취하는 데 어떤 끈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가장 최근의 10km 마라톤 기록!! 1시간 안에 들어오다니!! 진짜 뿌듯했다


이제 겨울이 오면 아마도 달리기를 쉬게 될 것 같다. 더군다나 뛰고 나면 발목과 무릎이 아프기도 하고... 겨울에 근력 운동을 열심히 하고, 또 봄이 오면 달려야지. 10km 정도가 나의 최선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으며 조금 더 높은 목표가 생기기도 했다.  조앤 배노잇 새뮤얼슨 이라는 최초의 여성 마라톤 올림픽 대회에서 우승한 마라토너의 이야기를 읽으며.. 내년 즘엔 하프 마라톤에 도전해 보고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통계에서 중요한 것은 논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