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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최재훈 Mar 29. 2024

친절한 차별과 무례한 위안을 걷어차기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가여운 것들' 리뷰

'가여운 것들' 스틸컷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역사를 통해 사람들은 끊임없이 차별과 구별을 통해 계급을 나눴고, 그렇게 나눠진 계급이 만들어낸 이야기들은 하나의 질서를 이루면서 역사가 되었다. 역사의 질서가 만들어내는 피라미드 구조는 다시 차별을 만들어 낸다. 다시 인간의 이성은 역사의 사건과 철학적 사유를 거치면서 세상의 구별을 지우고 차별에 맞서며 평등을 이야기하지만, 사회적 맥락에서건 경제적 여건에서건 자본주의라는 계급 사회 속에서 불평등과 차별은 끊임없이 되살아난다. 생각해 보면 태어나는 순간부터 소멸하는 순간까지 인간은 단 한 번도 모두 평등한 순간이 없었다.


결핍 혹은 과잉란티모스의 진화

기괴한 외모의 천재 과학자 갓윈 벡스터(윌렘 대포)를 통해 새롭게 창조된 여성 벨라 벡스터(엠마 스톤)는 갓윈의 보호 아래 저택에서 숨어 지내지만, 날이 갈수록 세상과 새로운 경험에 대한 호기심이 끓어오르는 여성으로 자란다. 벨라의 외모에 첫눈에 반한 바람둥이 변호사 덩컨 웨더번(마크 러팔로)은 더 넓은 세상을 모험하자는 제안을 하고, 덩컨이 맘대로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벨라는 넓은 세상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진화한다. 


‘송곳니’와 ‘랍스터’, ‘킬링 디어’ 등의 영화를 통해 기괴한 상상력과 기이한 정서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던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가여운 것들’은 여전히 기묘하지만 이전의 작품들에 비하면 한결 평온한 작품이다. 갑자기 나타난 과속방지턱처럼 덜컹 마음의 바닥을 긁는 기괴함을 최대한 걷어내어 많은 관객들이 조금 편하게 볼 수 있는 영화가 되었다. 


그의 이전 작품이 기괴한 정서와 상상을 절제된 표현으로 꾹꾹 눌러 담은 것 같다면, ‘가여운 것들’은 기이한 정서적 이물감은 최대한 줄이고 상상력을 넘치게 표현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상상력에 한정된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더 넓은 서사로 확장시킨 셈이다. 어쩌면 감독 스스로 벨라처럼 진화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그릇을 바꾸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심연을 긁고 생채기를 내는 불온한 상상력에 사로잡혔던 과거의 팬들은 감독이 아트 버스터에 고삐가 확 잡힌 느낌이 들어 아쉬워하지만, ‘가여운 것들’을 통해 새롭게 요르고스 란티모스를 만난 관객들은 상업영화의 틀 안에서 여전히 고삐가 풀린 듯한 기괴한 감독의 상상력에 열광하는 것 같다. 


란티모스 감독이 역사적 배경과 정치적 함의를 담은 서사를 펼칠 수도 있다고 확신하게 만드는 이 영화를 황당한 상상이 아니라 현실적 이야기의 층위로 계속해서 땅으로 끌어내리는 건 엠마 스톤이다. 엠마 스톤은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만들어낸 기이한 피조물이 짜깁기된 남성 괴물이 아닌 여성이었다면 이야기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묻는 원작과 란티모스의 질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물감 없이 진화하는 연기로 설득한다. 


무례한 위안을 뛰어넘기

알려진 것처럼 영화 ‘가여운 것들’은 엘러스데어 그레이 작가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여성판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라고 평가받은 만큼 메리 셸리의 고전 소설 『프랑켄슈타인 : 현대의 프로메테우스』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메리 셸리의 소설은 종교의 권위가 부정되고, 인간의 이성과 과학이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 거라는 19세기의 정서를 그대로 담아낸 작품이다. 이후에도 다양한 변종, 비이성적 피조물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다양한 작품들에 영감을 주었다. 


원작자 엘러스데어 그레이는 공장 노동자의 자녀로 태어났으며, 소설가로 뿐만 아니라 디자이너이자 화가로 활동하였다. 경이로운 상상력 속에 회화적인 느낌이 나는 것도 작가의 다양한 예술적 재능 덕분인 듯하다. 섬세한 묘사와 상상력으로 이미지의 콜라주를 만들어내는 것 같은 소설 속 묘사는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상 표현에도 크게 영향을 미친다. 


‘가여운 것들’은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남녀의 성역할과 아버지의 역할을 완전히 새롭게 조립한다. 가부장제의 권위에서 달아나기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그 당시 여성이 할 수 있는 가장 능동적인 대처였다면, 죽은 어미의 육체를 물려받은 벨라는 단지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평등과 구원을 이야기할 수 있는 온전한 하나의 인간으로 진화한다. 


적극적인 여성 캐릭터와 함께 눈에 띄는 것은 남성 캐릭터의 변화다. 아버지의 지독한 실험 대상으로 학대받았던 갓윈 박사는 지독한 악행의 대물림에서 벗어나 누구도 학대하지 않는 어른으로 성장한다. 자신이 만들어낸 피조물 벨라를 진짜 자식처럼 아끼지만, 벨라가 선택하는 미래를 방해하거나 벨라를 소유하려하지 않는다. 갓윈 박사의 제자이자 벨라의 약혼자 맥스 맥캔들리스 역시 벨라에게 집착하지 않지만 언제나 곁을 지키는 동반자로 든든하게 자리하고 있다.


벨라가 갓윈의 곁을 떠나 덩컨과 리스본에 도착하면서 육체의 경험에 눈을 뜨는 순간 흑백이었던 영화는 컬러가 된다. 이전에 벨라의 엄마가 죽을 때만 칼라였던 화면이 벨라가 여성으로 태어나는 순간 컬러로 변한다는 설정은 상징적이다. 그리고 벨라가 이성보다 먼저 육체의 욕망에 눈을 뜬다는 설정을 통해 순수한 영혼과 성숙한 육체라는 기묘한 관계 속에 여성의 이야기를 새롭게 써내려 간다. 


남자에 의해 창조된 여성이라는 프레임, 남성을 피해 달아난 여성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벨라는 남성의 도움과 남성의 선택이 아니라 오롯한 자신의 이성으로 세상을 받아들인다.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감정과 명쾌한 이성이 조화를 이루는 순간, 벨라는 온전한 어른이 된다. 


그간 여성 혹은 사회적 약자들은 역사적으로 완전히 평등한 자격을 얻은 적이 없다. 세상은 친절하게 그들을 배려하는 척 하지만 이전에 비해 많이 나아졌다고 하는 건 아직 멀었다는 말이다. ‘가여운 것들’ 속 벨라는 누구라도 될 수 있고 어떤 삶도 선택할 수 있다. 많이 나아졌다는 무례한 위안과 친절한 차별 대신, 진짜 변화해야 하는 미래를 응원하는 란티모스의 화두가 든든해졌다.


[OST 정보] Milan Records / Jerskin Fendrix

피아니스트이자 바이올리니스트, 작곡가인 저스킨 펜드릭스의 영화 음악은 벨라의 마음이 세상과 교감하는 순간을 음악으로 표현한다. 처음에는 단순한 목관 악기의 소리에 반응하다가, 벨라의 감정과 이성이 깨치면서 음악의 구성은 더욱 다양해지고, 불협화음의 음조에서 벗어나 멜로디가 된다. 


글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여 등단하였다.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으며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나는 아팠고어른들은 나빴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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