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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최재훈 Apr 19. 2024

그리움이라 부르는, 외로움의 덩이

영화 '화양연화' 리뷰

'화양연화' 스틸 컷

멈춰 서게 만드는 그리움이 있다. 눅진한 빗물이 휘감아 녹물처럼 남았던 몸의 기억. 후덥지근하게 내려앉은 밤이 뿜어내는 향기. 함께 먹었던 국수의 맛. 함께 걷던 길, 끔뻑거리던 가로등 불빛. 기다리던 전화의 앙칼진 벨 소리. 뒤돌아 달리던 하이힐 소리. 그 사람이 문득 보고 싶은 시간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노래. 뽀얗게 먼지 위로 퍼지던 담배 연기와 매캐하게 남은 체취. 그렇게 그날의 날씨, 그날의 감정, 그리고 그날의 냄새가 덩어리처럼 훅 현재로 들어온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함께 있던 사람의 표정과 그 사람의 감정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가 말하는 그리움의 대상은 그대의 내가 아닌, 그때의 나인 것 같다.     


외로움의 무게

1962년 홍콩. 신문사 편집기자인 차우(양조위) 부부와 무역회사 비서로 일하는 리첸(장만옥) 부부는 같은 날 아파트로 이사 온다. 어느 날 두 사람은 차우의 넥타이와 리첸의 가방이 각자 배우자의 것과 똑같은 것을 알고 배우자의 불륜을 눈치챈다. 각자의 배우자가 서로에게 이끌린 순간이 궁금해진 두 사람은 상황극을 한다. 서로에게 어떻게 끌렸는지 역할극을 하면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끌리는 마음을 깨닫는다. 각자의 배우자를 탓하며 서로를 위로하지만 둘의 만남은 비밀스러울 수밖에 없다. 


4k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20년 만에 재개봉한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는 각자의 기억 속에 갇힌 채 죄의식과 애증으로 남아버린 어느 한때가 내 생애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은 아닐까 기억하게 만드는 영화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더 깊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눅진 거리는 여름밤의 습기처럼 서로에게 무겁게 스며드는 리첸과 차우의 이야기를 통해 감정의 소동과 그 먹먹한 그리움을 말한다.


그리고 ‘화양연화’는 아쉬운 기억과 그사이에 숨겨둔 진심을 감당할 자신이 없는 사람들의 쓸쓸함과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대한 낭만적인 꿈은 그 믿음에 대한 배반을 겪고서도 여전히 믿어보고 싶은, 생명력이 긴 바람이다. 비루한 현실을 꿋꿋이 딛고 언젠가 자신의 삶에도 등불처럼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찾아올 거라는 작고 끈질긴 믿음을 끝내 놓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란히 걸을 수 없는 차우와 리첸의 진심은 아주 멀다. 그래서 함께 공유하고 있다고 믿었던 기억은 조각처럼 떠돌다가 사라진다. 상실의 먹먹한 시간과 함께 스쳐 지나가고, 각자의 생존법으로 살아가는 두 사람은 교차점 없이 점점 멀어진다. 차우는 자신의 가장 아름다웠던 기억, 소심할 수밖에 없었던 사랑을 앙코르와트 사원 속에 봉인하고 돌아서며 ‘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라고 읊조린다.      


그리움의 덩이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만하면 됐다고 믿는다. 적당히 웃고, 적당한 사람들과 그만하면, 이만하면 된 거라고 살아간다. 차우와 리첸은 지루한 현실과 서서히 식어가는 관심 속에서 외로움을 앓고 있지만 그렇게 괜찮은 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조금만 흔들어 놓으면 금세 다시 부옇게 흐려지고 마는 이들의 삶은 약간의 자극만 주어도 툭 끊어질 것처럼 날을 세운 우울증과 그것을 잊기 위해 축 늘어지고야 마는 권태 속에 있다. 


왕가위 감독은 만날 기회와 시간이 늘어나면서 감정을 숨길 시간과 기회가 점점 줄어드는 두 남녀 사이로 들어가 섬세한 시선으로 감정의 격랑을 바라보고 쓰다듬는다. 앞뒤 가리지 않는 격정적 사랑을 하기에 차우와 리첸은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사람들이다.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 서로는 자신을 잡아달라는 신호를 보내지만, 이들은 사랑을 떠나보내 상대를 향한 진심을 지킨다. 


각자 지닌 다른 기억과 바람은 빈틈이 되어, 삶의 공허함을 키워간다. 같은 시간을 지나면 함께 있다고 생각하지만, 명쾌한 답이 없는 각자의 기억과 태도는 두 사람의 이별을 예정된 것처럼 당연하게 만든다. 왕가위 감독은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 두 사람이 일상을 묵묵히 살아내는 것으로 상처를 극복하는 시간을, 새로운 삶이 다시 낡아가는 시간을 열어둔다. 뽀얗게 퍼지는 담배 연기처럼 요란하지 않게 두 사람 사이를 휘감는 침묵은 권태가 아닌 교감이었다. 그래서 왕가위 감독이 만들어낸 이 지독하고 무거운 사랑은 침묵하는 순간 비로소 대화를 시작한다.


‘화양연화’는 100분간 이어지는 액자 같은 영화다. 90년대 홍콩 영화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던 왕가위 감독의 미장센은 매 순간이 농염하다고 느껴질 만큼 아름답다. 카메라는 낡은 홍콩의 거리와 꽉 조인 장만옥의 마네킹 같은 몸, 텅 비어 있는 양조위의 눈동자를 쓸쓸하게 바라본다.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눈빛이다. 그 그리움의 눈으로 카메라가 빛과 창살을 이용해 마치 리첸이 감옥에 갇힌 것 같은 순간을 만들 땐 쓸쓸함이 너무 깊어 숨이 턱 막힐 것 같다. 


90년대 왕가위는 홍콩 반환을 앞둔 정체성의 상실과 우울한 기류를 가장 먼저 포착해낸 감독이다. 1990년 ‘아비정전’은 극장 개봉 당시 너무나 재미없다며 환불 소동을 일으켰다. 발 없는 새 같은 삶을 허무한 표정에 실어 감각적이면서도 나른하게 그려낸 이 영화를 둘러싼 소동은 당시 사람들이 홍콩 영화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준다. 왕가위의 등장과 함께 80년대를 호위했던 홍콩 누아르와 코믹 도박영화는 스르륵 사라졌었다. 


그리고 시작된 21세기, 기대보다 딱히 달라지지 않은 시간은 미래보다 과거에 가까웠다. 그래서인지 21세기에 만들어진 ‘화양연화’의 시간은 과거를 향한다. 영화 속 차우가 글을 쓴다는 핑계로, 리첸과 만나는 방의 번호는 2046이다. 지난 1997년 7월 1일, 홍콩은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되었지만 50년간 홍콩의 자치를 용인하였다. 그래서 2046년, 홍콩은 완전히 중국에 귀속된다. ‘화양연화’ 속 2046호는 홍콩의 아득했던 역사, 80년대와 90년대에 세계를 매료시켰던 그 문화가 종지부를 찍는 해를 상징한다.


‘화양연화’가 머무는 시선은 이미 끝나버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다. 이것은 어쩌면 전성기가 끝나버린 홍콩 영화에 대한 아쉬움일 수도 있고, 시한부 인생을 사는 홍콩 자체에 대한 회한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미 끝나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말하는 차우의 말끝에 묻어있는 진한 그리움은 두 사람의 이야기가 파국도 종결도 되지 않은 어쩌면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여운을 남겨둔다. 그 그리움의 덩어리가 툭, 심장 위로 떨어진다. 


화양연화 (2000)

•감독 : 왕가위

•출연 : 장만옥(수 리첸), 양조위(차우 모완)

•국내개봉일 : 2000.10.20. / 2020.12.24.(재개봉)

•관객수 : 129,019명

•볼 수 있는 곳 : 넷플릭스, 티빙, 쿠팡플레이, 웨이브, 왓챠, U+모바일, 네이버시리즈온


글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여 등단하였다.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으며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나는 아팠고어른들은 나빴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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