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는 맞고 개기는 틀리지. 암 그렇고 말고.
빨래를 좋아합니다. 길 가다 좋은 향기를 맡으면 뒤돌아볼 정도죠. 잘 빨아진 옷감에선 특유의 신선한 향이 납니다.(더러는 여성의 샴푸향에 멈칫하기도 하지만) 그 냄새를 맡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리곤 상상하죠. 저 옷감은 어떻게 빨아졌을까. 식초를 넣었을까. 베이킹 소다와 구연산은? 가루 세제일까 액체 세제일까. 이 향은 피존과 다우니, 샤프란과는 다른데 도대체 어떤 섬유유연제를썼기에 이토록 상쾌할까. 간혹은 빨래 이상의 것을 상상하기도 합니다. 이 빨래는 누구의 손을 거쳤을까. 그 사람은 프࣪레࣪쉬࣪가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프࣪레࣪쉬࣪한 사람일까. 그래서 이토록 아름다운 빨래를 한 것일까.(과장은 있지만 저는 대체로 이런 식으로 사고합니다)
빨래의 참맛을 알게 된 건 세탁기를 바꾸고나서입니다. 1년쯤 전인가요, 삼성 드럼통 세탁기에서 LG 통돌이로 바꿨습니다. 바꿀 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느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드럼통의 1.5배쯤 되어 보이는, 반짝이는 통돌이를 보는 순간, 무언가가 마음 안에서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약간의 반발심을 느꼈습니다. 그동안 드럼통 세탁기가 마음에 들었던 적이 없었단 걸 깨달았죠. 드럼통은 어떻게해도 정 붙이기 어려운 녀석이었습니다. 일단 중력에 반하는 방식으로 빨래감을 위로 아래로,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빨래하는 게 마뜩잖았습니다. 잘 돌다가 빨래를 퉁퉁하고 아래로 떨어뜨리는 모습을 보면 괜히 뾰룽퉁해졌죠. 다람쥐를 쳇바퀴로 신나게 굴려놓고 다람쥐가 기진맥진하자 단물 다빠졌다는 듯 바닥에 떨어뜨리는 것 같았죠.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건 역시나 빨래의 중심을 보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저런 식으로 깨끗해지는구나’ 라는 생각보단 아니 ‘저딴 식으로 빨래를 굴린다고?’ 그런 반감이 있었습니다. 저는 잠들 때면 바디 필로우를 애용하는데 한 번은 선물 받은 바디필로우를 빨았습니다. 카카오의 라이언 캐릭터가 박혀 있었죠. 물에 젖어서 빙글빙글 도는 라이언을 보고 있자니 어딘지 안쓰러웠습니다.(안타깝게도 인간의 공감은 이런 식의 오류를 일으킵니다) 어찌됐든 그건 일종의 농담이나 장난 같은 마음이라서 그냥 가볍게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LG 배송 기사 손에 끌려나가는 드럼통을 보면서 그건 장난이 아니라 아주 진지한 거부감이구나, 알게 됐죠.
그렇게 떠나 보낸 드럼통 얘기는 이만 접어두고 통돌이와의 첫 만남을 얘기해보겠습니다. 통돌이에 대한 첫 느낌은 거인을 마주하는 일과 같았습니다. 집만한 주먹을 땅으로 내리치든 거인이 다윗의 돌팔매질처럼 빨래를 힘껏 돌리든 찌든 떼가 한방에 벗겨질 듯했죠. 그 크기며, 세균 번식을 막는 스테인레스 통까지. ‘빨래에 대해 한참 모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 녀석은 빨래를 위해 태어났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어느 분야든 장인을 존경하고 흠모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녀석은 빨래의 장인으로서 제 존경을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통돌이를 들인 후부터 빨래는 제 몫이 됐습니다. 어머니가 빨래를 하지 못하도록 작동법도 알려드리지 않았죠. 빨래를 뺐기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을까요. 아니면 어머니에게서 빨래를 빼앗아오고 싶은 마음이었을까요. 어쨌든 그 주에만 빨래를 5번 했습니다. 빨래가 끝나고 잠겼던 뚜겅을 열었을 때 수줍게 김을 내는 미지근함이 좋았고, 빨래감이 뽀송뽀송함을 집어삼킨 듯한 상쾌함이 좋았습니다.
저의 빨래법은 간단합니다. 빨래를 분류해서 나눠 빨고 세제는 액체 세제를 씁니다. 기능성 의류는 손빨래를 합니다. 물의 온도는 빨래에 따라 다릅니다. 의류는 냉수로만 빨고 수건과 속옷은 온수와 냉수로 섞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제 빨래법의 백미는 마지막 행굼입니다. 결국 빨래의 즐거움은 여기서 판가름나죠. 마지막 행굼물이 들어갈 때 식초를 듬뿍 뿌리고 다우니 섬유유연제를 넣습니다. 이것저것 시도해본 끝에 질감과 향을 결정하는 타이밍이 바로 이때란 결론이 나왔습니다. 빨래에서 냄새가 너무 난다 싶으면 구연산을 넣기도 하지만 그러면 다우니의 향이 죽어버립니다. 그래서 대체로 식초와 섬유유연제만 넣죠. 처음엔 식초 냄새 때문에 불쾌했습니다. 하지만 건조가 끝나면 식초향은 사라지고 다우니 향만 남습니다. 그래서 식초는 그저 운동 중에 흘리는 땀 정도로 여기고 있습니다. 쉰내가 두렵더라도 운동의 상쾌함은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빨래에선 향기가 납니다. 건조대에 대롱대롱 메달린 의류를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뿌듯하죠. ‘아 내가 이렇게 상쾌하고 향기나는 녀석을 만들다니.’ 제가 다 향기로운 인간이 된 듯합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메달려 있을 순 없습니다. 올라간 건 내려가야 합니다. 메달린 건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려놓은 끝에 빨래 개기가 남습니다.
요즘엔 빨래의 전 과정에 기계가 개입합니다. 세탁기도 있고 건조기도 있고 lg 스타일러/삼성 에어드레서라는 의류관리기도 있습니다. 심지어 배달 서비스로 빨래를 남에게 넘길 수도 있죠. 하지만 상당량의 빨래를 건조대에서 내리고나면 왜 빨래 개주는 기계는 없는 것이냐, 작은 분노가 치밉니다. 공처럼 잘 말아서 던져버리고 싶은 분노죠. 공학적으로 보았을 때 그런 기계는 상당히 비쌀 겁니다. 들어가는 부품과 프로그램, 잡아먹는 전기에 비해서 효율성이 좋지 않을지 모르죠. 하지만 아무리 비효율적이라도 ‘상관없다. 이 귀찮음과 짜증에서 해방시켜달라’ 그렇게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사실 제가 빨래를 개기 싫어하는 이유는 그것이 비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펼쳐서 입을 걸 힘들여 개놓는 이유가 무엇일까. 에너지 낭비 아닌가. 빨래를 개며 자조하게 됩니다.(불평불만해도 일단은 개고 있습니다) 저는 좀 이상한 사람이라서 이런 식의 사고가 가능하죠. 물론 반론이 있을지 모릅니다. 구겨진 옷을 입고 나가면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지 않나. 그렇게 부끄럽지 않아서 별로 상관은 없습니다. 그러니 옷장에 우겨넣고 싶은 것이겠죠. 한편으로 생각은 있으나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이유는 뭘까 스스로 묻곤 합니다. 그 답은 분명합니다. 어떤 사회적 자기 검열 장치가 작동하는 까닭이죠. 그 검열 장치를 심은 사람은 ‘가족’이고 나중에 가도 ‘가족’이 될 겁니다. 만약 진정으로 혼자 살아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 이후부터 평생 쭈욱 빨래 따위는 개지 않을지 모릅니다. 누군가 숨이 꺼진 제 방을 보았을 때 “이 사람은 진정으로 효율적 사고를 가졌구나”라고 할지, “귀찮음이 도가 지나쳤다. 숨쉬기도 귀찮아서 가버린 것인가”라고 할지 궁금해집니다. 어느 모로보나 후자에 가깝겠죠.
요즘은 빨래의 전과정을 제가 담당하지만 가끔은 피로에 지쳐 빨래 개기만큼은 미루게 됩니다. 그때면 어머니는 바닥에 주저 앉아서 묵묵하게 빨래를 갭니다. 그 옆모습을 슬그머니 바라보다 저도 옆에 앉아서 빨래를 개기 시작합니다. 이럴 때는 좀 약아빠져서 개기 쉬운 수건부터 개죠.
어느 날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옛날에 빨래를 어떻게 했냐고. 고향이 수원인데 어머니 어렸을 적엔 집 근처에 개울이 흘렀다고 합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는 그게 강처럼 느껴졌다고 했을 만큼 큰 개울이었죠. 거기서 방망이로 빨래감을 쳐대며 빨래를 했습니다. 나중에 세탁기가 나와서 한결 편했다고 말했죠. 그 얘기를 듣다보면 그 시대의 여성은 도대체 어떤 짐을 지고 산 것인가 머리가 아득해집니다. 대가족이었을 테니 적어도 여덟 식구 많게는 열 식구의 빨래를 개울까지 짊어지고 가야하고, 겨울이면 차가운 물에 손 담가가며 방망이질을 해댔다니. 물에 분 빨래감을 들고 오는 일 역시 중노동이었을 겁니다. 세탁기 거인님에게 의지하는 저로써는 정말 거인 앞에 난장이인 셈입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보면 빨래 개주는 기계 따위 아무렴 어떻냐고 토라졌던 마음이 풀어집니다. 의식하지 않은 채 손을 움직여 빨래를 개고 눈은 옷과 수건을 바라보죠. 하지만 귀만큼은 어머니를 향합니다. 대화하자고 앉은 건 아닌데 어느 순간 대화하기 위한 빨래 개기가 되었있고, 가볍게 꽂히는 말소리는 잔잔합니다. 어머니이긴 해도 어머니 이전의 한 사람입니다. 한 사람의 과거와 추억을 부담없이 듣는 일은 아무래도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만듭니다. 빨래 개기라는 컵에 나의 호기심 한 티스푼과 누군가의 추억 한 티스푼을 담아서 잘 우려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 컵에선 다우니의 상큼한 향기가 나고. 온기는 사람의 체온과 같아서 가만히 만지는 것만으로도 포근해집니다.
어머니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온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누군가 들려준다면, 그렇게 함께 빨래를 개준다면 상당히 즐거울 겁니다. 여전히 빨래는 맞고 개는 건 틀리지만 빨래 개주는 기계 따위 바라지도 않습니다.
에필로그 - 사소한 일을 이상하게 쓰는 재주가 있지 않을까, 하고 사소한 글을 이상하게 쓰면서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