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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의 깃털 Oct 29. 2021

아버지,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계속된다. 함께 있지 못한다 해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지난 6월의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나의 아버지도, 나도 예외가 아니다. 아버지는 여든두 해를 사셨다. 그리 짧은 생은 아니었다. 팔 년 전쯤일까(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아버지는 알츠하이머(치매)와 불안장애 진단을 동시에 받으셨다. 나빠지는 속도가 제법 빨랐다. 치매가 심해지면서 불안장애는 저 멀리로 달아났다. 조금씩 조금씩 아버지가 아닌 사람이 되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뇌경색이 찾아왔고, 말을 잃었고, 움직이는 일 조차 어려워졌다.


올 3월, 집에서 도저히 모실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요양원에 가셨다. 코로나 때문에 면회가 쉽지 않았다. 유리창 너머로 아버지를 볼 수 있었다. 그 조차도 큰 의미가 없었다. 아버지는 누구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렇게 2개월이 지났을 때, 폐렴이 찾아왔다. 한 달여간의 병원생활 끝에 아버지는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생각보다 슬프지 않았다. 장례절차가 끝난 후, 나는 다시 빠르게 일상으로 복귀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래, 아버지가 죽었지'라고 오도카니 읊조리는 버릇이 생겼을 뿐,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의문스러웠다. 나는 이 이별이, 상실이 왜 그다지 힘들지 않은 걸까.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아버지는 너무나도 특별한 존재였다. 아버지의 사랑 역시 컸다. 아버지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지금까지도 느껴질 만큼. 오래 생각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이미 수년 전, 아버지의 치매가 심해진 그때, 이미 이별했고, 상실감으로 괴로워 했고, 충분히 슬퍼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버지의 기억 속에서 가족도, 자신도, 추억도 모두 사라졌을 때, 아버지는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유시민이 말했다. '치매는 철학적 의미의 죽음'이라고. 치매에 걸려 무너져 가는 아버지를 보며 나는 늘 저 말을 떠올렸다. 거기 내가 알던 아버지는 없었다. 그건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런 아버지를 지켜보는 일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아버지를 보러 집을 나설 때는 가고 싶지 않은 내 마음과 늘 싸워야 했다. 더불어 나도 결국 치매에 걸리게 될 거라는 공포가 나를 짓눌렀다. 아버지 생각을 하지 않으면 숨이 좀 트였다. 아버지를 향한 애틋한 마음과, 나를 지키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늘 갈피를 잃고 헤매던 시간들이었다.


서른 살의 아버지 모습. 젊은 시절의 아버지가 낯설지만, 내 기억 속에 영원히 남겨놓고 싶을 만큼 아버지의 모습이 참 예쁘다.

그럼에도 나는 평소보다 아버지를 자주 찾았다. 전화통화가 가능할 때에는 늘 사랑한다고 말했고, 아버지를 만나면 아버지를 안고 쓰다듬고 눈을 맞췄다. 이 모든 것이 치매 때문에 가능했다. 우리는 다정하고 애정이 넘치는 부녀 사이가 결코 아니었다. 이 상황이 참으로 아이러니해서 또 슬펐다. 아버지가 치매에 걸려 유일하게 좋은 한 가지였다. 나중에 아버지는 아기가 되었다. 밥을 먹는 방법도 잊었다. 아버지에게 밥을 먹여주며 생각했다. 기억나지 않는 아기 시절, 아버지도 나에게 이리 했겠지.


대소변을 못 가리는 상황이 길어지자, 어머니는 힘겨워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에게 극진했지만, 가끔씩 아버지를 때렸다. 나는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아버지가 불쌍했지만, 요양원에 보내겠다는 말이 나올까 봐 무서웠다. 어머니의 고통을 모르는바도 아니었다. 아버지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도, 여기가 집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알 것 같았다.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혼자 지낼 아버지를 생각하면 숨이 턱 막혔다. 엄마에게 맞고 지내는 것보다 차라리 요양원이 나을까. 내가 아버지를 모실 수는 없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또 생각하고 생각해도 아버지의 대소변을 받아낼 자신은 도저히 없었다. 


아버지가 요양원으로 옮기던 날, 나는 집에 가지 않았다. 아니, 갈 수 없었다. 아버지를 볼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와야 하지 않냐는 엄마에게 말했다. 나는 갈 수가 없어. 나는 너무 많이 울 거야. 나는 자신이 없어. (무너지게 될 거야) 엄마와 나는 그 시절, 참 많이 울었다. 부둥켜안고도 울었다. 엄마도 혼자 많이 울었을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마음속에 슬픔이 차오른다. 


언젠가부터 늘 하느님께 기도했다. 아버지를, 제발 빨리 데려가 달라고. 하느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 일반병원에서 요양병원으로 옮기던 날 의사는 말했다. 좋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6개월을 사실수도, 1년을 사실수도 있다 라고. 아버지는 요양병원으로 옮긴 후 이틀 뒤,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하느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아버지는 이제 고통에서 해방된 거라고. 본래의 자신을 다시 찾았을 거라고. 내가 아는 아버지라면, 치매에 걸린 스스로를 그동안 견디기 힘드셨을 거라고.


한 동안은 힘들어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병상에 묶여있던 모습, 손에 치매환자용 장갑을 끼고 고통스러워하던 모습(치매 환자는 링거같은 장치들을 빼려하기 때문에 장갑을 채우거나, 치료가 필요할 땐 잠깐 묶어놓기도 한다), 중환자실에 고통스러운 얼굴로 누워있던 아버지, 아파도 아프다고 말할 수조차 없었던 아버지 모습이. 


요즘은 아버지와 행복했던 시간들이 조금씩 기억난다. 나 조차도 잊고 있던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들. 여름에 개천에서 수영을 가르쳐 주던, 겨울이면 스케이트를 함께 타러 가던 젊은 아버지의 모습. 나를 자전거 앞에 싣고 시장에 가서 분홍색 샌들을 골라주던 모습, 밤늦은 시간 주전부리를 사들고 들어오는 모습 같은 것들. 이런 기억 속에 아버지는 아직 젊고 건강하다. 그게 참 좋다.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수첩에서 아버지가 쓴 일기가 발견되었다. 가족들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자 노력했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아버지는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해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법을 잘 알지 못했다. 기질적으로 예민하고 섬세해 우울이나 불안과 함께였고, 또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고군분투했을 것이다. 아버지로 부터 상처를 받았지만, 나는 나를 낳았던 아버지의 나이를 넘어서면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사랑은, 비록 내가 원하는 방식은 아니었지만, 언제나 넓고 깊었다. 아버지가 나에게 주었던 사랑은 영원히 마음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했고, 영민했고, 소신과 원칙을 갖춘 사람이었다. 대쪽 같았지만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에게 너그러웠다. 내가 이 정도로나마 사람 구실을 하고 사는 것은, 아버지의 삶을 지켜보며 배운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으셨지만 나를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다. 비록 아버지는 이 세상에 없지만, 나는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딸임을 늘 기억하려 한다.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나중에 아버지를 다시 만나면 부끄럽지 않을 수 있도록.


오랫동안 아버지를 떠나보낸 일에 대해 쓰고 싶었으나, 쓰지 못했다. 글을 쓰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볍다. 힘들 때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저기 먼 곳에서 아버지가 지켜보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제 죽음은 조금 더 두렵지 않은 일이 되었다. 무지개다리를 건너면, 아버지가 환한 얼굴로 마중 나와 있을 것이므로. 


순간순간 아버지의 사랑을 느낀다. 그 사랑이 언제나 나를 지켜줄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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