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까지 끌어모아 일단 걷기
요즘은 프렛즐을 최대한 자주 먹는다. 주문과 동시에 구워주는 카페가 언제 망할지 몰라서. 지난날이 내게 준 교훈은 단순하다. 있을 때 즐겨라. 대중과 결이 달라 잃어버린 게 한 트럭이라서. 표준 사이즈의 몸을 가진 사람이 쇼핑하기 편하듯, 모두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했다면 세상을 살아가기가 좀 더 수월했을까.
내 집은 어디에
대중의 관점에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일들 앞에 서면 늘 자신이 없다. 취향과 현실은 언제나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좋아하는 과자는 쉽게 단종이 되고, 아끼는 공간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그런 순간들이 계속 쌓였다. 보편적인 취향에서 비켜있음을 인정하고 살다 보니 세상과 점점 더 벌어진 기분이 든다. 이제 의식적으로 간격을 조절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더 무겁게 느껴지는 걸까. 사실 속 시끄러울 일 없이 감당할 만한 부담만 지고 살았는데, 작년부터 집을 사야 할 때가 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사람이란 결국 주제만 바꿀 뿐 평생 결핍을 갖고 살아가는 존재니까, 어떤 선택을 하든 거기서 끝나지 않을 거다. 그래도 최소한 내 선택을 '실패'라고 느끼고 싶지는 않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온라인에서는 빨리 정신을 차리라고 말한다.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 비싼 집을 사라.' 다른 것에 비하면 대중과 가까운 취향이지만, 현실을 고려하여 타협이 필요하다. 그런데 정보를 찾을수록 아득해졌다. 무서운 말들이 넘쳐흐른다. '영혼까지 끌어모으지 않으면 후회만 가득할 거야'
타인의 말에 크게 휘둘리지 않는 편인데도 아찔하다. 말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느껴졌달까. 대단한 결의를 갖고 살지는 않았더라도,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을 견디며 쌓은 것을 한 방에 불 속으로 내던지는 일이다. 그러니까 대세를 따르라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이번만큼은 취향을 최대한 지우고 대중의 시선에 맞추는 게 좋을까? 그렇게 오랜 시간 참으면 잘했다고 생각하게 될까? 선택도 결과도 결국은 내 몫이다. 일단 영혼을 끌어모아 걸어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두 발로 보는 풍경
세상이 어수선한 건 어쩔 수 없다. 어쨌든 사람들은 땅 덩어리를 정육점의 고기처럼 등급을 매겨 부르곤 했다. 쫄보인 나는 급등주에 올라타 인생역전을 꿈꾸는 배짱 같은 건 없다. 다만 조언인지 조장인지 모를 말들 속에서도, '걷는 게 도움이 된다'는 말에는 이견이 없었다.
어디부터 어떻게 걸어야 할까. 지도에 찍히는 숫자와는 다른 공기. 같은 서울 하늘 아래서도 분위기가 다 다르다. 좋고 나쁨이 아니라 그냥 다름. 행인들의 모습이나 놀이터의 아이들, 세월을 드러낸 거리와 상가, 우거진 나무 그늘까지 다르다. 서울에서 자라고 내내 일했지만 모두 같은 서울이 아니구나.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어디에 닿을 수 있을까.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어?
왜 이렇게 비쌀까. 집이 이렇게 낡았는 데? 다닥다닥 붙어 있고, 나무도 별로 없는 데? 언덕배기라 숨이 차고, 딱 봐도 주차는 전쟁인데? 수많은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다. '땅의 가치' 때문이래. 건물은 어쨌든 낡아. 그래서 당장 살기 좋은 곳과 가격이 딱 맞지 않는다. '가능성'이자 사람들의 '욕망'이 숫자로 표현되는 것뿐.
부동산도 자산이니까 기대로 오르는 게 이상하진 않다. 지금까지 리스크가 제일 낮은 자산 증식 수단이었다는 것도 맞다. 그 '가능성'이 나와 얼마나 닿아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런 세상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니까 당장의 편안함을 선택할지, 미래의 불확실한 가치를 선택할지 결정해야 한다. 그 중간을 어떻게 타협할 수 있을까. 답을 찾을 때까지 뚜벅뚜벅 걸어야 한다.
새로운 시선으로 거리를 걷는다. 어느 정도로 대중과 거리를 둘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적당히 대충 살고 싶은데 쉽지 않다. 사실 '적당히'라는 기준은 계속 바뀌기 때문에, '적당히' 만큼 어려운 게 없다. 기력을 회복하는 데도 걷기가 좋다니까, 이렇게라도 자꾸 걷다 보면 어느 쪽으로든 조금은 나아가겠지. 프렛즐을 먹듯, 가능한 자주 걷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