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사랑은 서로 다른 두 세상의 만남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사랑을 하게 되면 내가 모르던 타인의 세계가 나의 세계와 겹쳐지면서 나의 세상이 넓어진다고, 이별 후에도 넓어진 나의 세상에서 타인의 조각들이 추억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고. 그래서 사랑은 사람을 성숙하게 하는 것이라는 내용의 글이었다.
이 내용이 비단 사람과 사람 간의, 에로스로서의 사랑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어느 한 가수의 노래에 대한 사랑도, 어느 배우와 그의 영화에 대한 사랑도, 하다못해 귀여운 토끼 이모티콘에 대한 사랑도 우리의 세계를 넓히는 데에 부족함이 없다. 모든 사랑은 새로운 경험을 동반하기 마련이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세상은 한층 깊어진다.
한창 볼빨간사춘기의 음악에 소위 말하는 ‘입덕’을 했을 때, 그녀들이 나오는 공연이란 공연은 다 쫓아다녔던 적이 있다. 덕분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12월에 첫차를 타고 나가 온종일 이태원 한복판에서 기다려 보기도 했고, 난생 처음으로 페스티벌에 가 보기도 했다. 그 모든 경험들은 그저 볼빨간사춘기에 대한 추억 외에도 다른 여러 가지 부산물들을 함께 남겼다. 이태원에서 기다릴 때는 평소에 보던 언덕 쪽 골목이 아닌, 아랫동네의 주택가들의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페스티벌에서는 처음 보는 사람들과 몸을 부딪히며 즐기는 슬램이란 것을 해보기도 했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입에 물려준 보드카 병을 원샷하고 나서 미친 듯이 뛰어 보기도 했다.
또 한번은 한 토끼 이모티콘에 푹 빠진 적이 있다. 귀여운 토끼가 덩실덩실 춤추고 헤실헤실 웃는 모습이 너무나도 내 취향에 맞았다. 신촌에서 해당 이모티콘 관련 상품을 파는 팝업스토어를 열 때, 당연히도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사 온 자그마한 인형 덕에 사람들이 왜 애착인형을 갖는지, 왜 자신만의 행운의 부적을 갖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누구에게도 말 못할 고민이 생기거나, 중요한 일을 앞두고 심장이 미친듯이 탭댄스를 출 때, 해맑은 표정의 토끼 인형을 바라보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한결 편안해진 기분을 느끼곤 했다.
개인적으로 좋아함과 사랑함의 경계를 “대상에 대한 열망으로 안 하던 행동을 할 때” 로 생각한다. 이 때의 ‘안 하던 짓’ 덕분에 우리는 평소의 자신이라면 상상도 못 할 용기를 내기도 하고, 일상에서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것들을 시도해 보기도 한다. 그런 새로운 경험들이 의외로 취향에 맞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우리가 갖고 있던 편견 하나가, 마음의 벽 하나가 허물어지곤 한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 덜 고집스러운 사람이 되며, 조금 더 남을 이해하는 사람으로 성장해 간다.
볼빨간사춘기에 대한 사랑이 없었더라면 락 페스티벌을 즐기는 지금의 나는 없을 것이다. 그 토끼 이모티콘이 없다면 어떤 일에도 쉽게 평정심을 회복하는 지금의 나 역시 없을 것이다. 대신에 락 페스티벌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폭력적이고 시끄러운 사람들로, 인형을 들고 다니는 사람을 유치한 키덜트로 생각하는 옹졸한 내가 존재했으리라. 이렇듯 사랑은 우리의 낡은 조각을 빼내어 새로운 조각으로 메워 주곤 한다. 이것이야말로 사랑이 지닌 가장 큰 힘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