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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upreneur 크리스티나 Aug 06. 2023

나는 왜 교사가 되고 싶었지?

당신에게 집은 어떤 곳인가요? 부모 혹은 보호자가 있나요? 하루를 끝내고 잠자리에 드는 순간은 어떤 기분인가요? 안정을 담보하는 공간일까요?
 혹은 답답하거나 불안한 공간일까요?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이들에게 집은 중요한 공간입니다.
가장 큰 영향을 주지요.
그런 곳이 안전하지 못하다면 어떨까요?

제가 교사가 된 이유는 바로 집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전에 썼던 에세이를 한번 읽어보시면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십 대 시절까지 ‘행복’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 매일이 불안의 연속이었고 평온한 하루더라도 불안의 습관이 내 몸에 깊숙이 스며들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불안은 나를 돌봐주는 사람의 부재, 폭력의 목격, 버려질 수 있다는 두려움 등의 다양한 이유로 시작되었다.

7살 소녀는 울며 언덕길을 뛰어 올라간다. 깜깜한 밤. 적막만이 깔린 밤. 소녀는 달린다. 살기 위해, 살리기 위해. 숨이 차오도록 헉헉대며 달려 빨간 대문 앞에 도착한다. 그 긴 거리를 한시도 쉬지 않고 뛰어 올라왔다.

“이모, 이모!” 소녀는 문을 쿵쿵 두드리며 소리친다. “문 좀 열어줘”

끼이익 어둠 속 노란 가로등에 비쳐 더욱 선명한 빨간 대문이 끼이익.. 무거운 소리를 내며 열린다. 이 문이 열리기 단 몇 분이 걸리지 않았지만 소녀는 ‘문이 안 열리면 어떡하지?’란 불안에 몸을 떨었다.

잠에서 막 깬듯한 모습의 여자가 나온다.

“무슨 일이야, 또 싸워?”

“응..”

소녀는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이내 상황파악이 된 여자는 안으로 들어가 옷을 걸치고 나온다. 소녀의 손을 잡고 소녀가 헐떡이며 올라온 골목길을 함께 내려간다.

소녀의 집에 불이 켜져 있다. 오고 가는 고함소리. 소녀에게 집은 안정과 지지의 공간이 아닌 폭력과 불안의 장소이다.

소녀는 그 상황에 그대로 얼어붙는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력감에 손가락 하나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어두운 이 시간보다 더 까맣게 타들어가는 소녀의 눈물과 마음은 곧 재로 뒤덮인다. 텅 비어 버린 눈동자와 마음. 계속되는 삶이 두렵다. 얼어붙은 심장과 몸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잠에 들기 전 불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한다.

‘제발 오늘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해 주세요.’

하지만 증폭된 불안감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다.

‘나에게도 행복이란 게 있을 수 있을까…?’

소녀는 잘 웃는다.

두려움을 숨기는 거짓

소녀는 활달하다.

현실을 부정하는 몸짓

조금이나마 상황을 전환시키기 위해서, 조금이나마 이 상황을 유지하기 위한 과장과 간절함이다.

차라리 깨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트라우마

과거 경험했던 위기, 공포와 비슷한 일이 발생했을 때 당시의 감정을 다시 느끼면서 심리적 불안을 겪는 증상


다시는 꺼내고 싶지 않은 그날들의 기억과 감정은 시간이 흘러도 몸 안에 각인되어 또렷이 남아 있다. 겪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머리를 흔들며 부정한다고 사라지는 것은 않는다. 시간이 지나 무뎌진 곳도 있지만 불현듯 그때의 기억이 다시금 떠오르면 감정의 상처 역시 꾹꾹 저리며 아파 온다. 쇳덩이가 가슴속을 답답하게 짓누르는 듯하다.

친아빠가 아닌 사람을 아빠라 부르며 십 년 넘게 함께 살았다. 정확히 13살 때까지.

무조건적인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은 아니었다. 화물차 운전을 했던 그는 다섯 살, 어린 나를 데리고 지방 이곳저곳을 데리고 다니기도 했고 엄마와 셋이서 캠핑 여행을 가기도 했다.

동시에 존재하는 다른 기억은 물건을 부시고 엄마를 때리는 장면. 엄마의 머리를 가위로 자르기도 했고, 말 그대로 이단옆차기로 엄마를 때려 엄마의 갈비뼈가 금이 간 적도 있다. 그리고 나는 그 폭력의 순간에 함께 있었다.

어느 날 용돈을 담아두던 실비아 비타민 노란 상자에 꼬깃꼬깃 모아둔 삼천 원이 있었다. 엄마가 달라고 했다. 택시를 타기 위한 돈이었다. 아빠가 잠시 나간 틈을 타 엄마는 나를 데리고 할머니집으로 도망치듯 나갔다. 그날도 당연히 폭력이 오가고 있었다. 엄마와 내가 탄 택시는 빨간 신호 앞에 멈춰 섰다. 어느새 차를 타고 금방 따라온 그는 택시문을 열고 엄마를 내리게 했다. 엄마가 다시 실랑이를 하며 택시 안으로 타자 이번에는 나를 데려가 차에 태웠다. 엄마가 탄 택시는 떠나고 나 혼자 남겨졌다. 그는 나를 할머니댁 근처 어딘가에 내려두고는 알아서 길을 찾아가라고 말했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아는 할머니댁의 골목을 얘기하며 아는지 물어봤지만 일곱 살 아이가 처음 보는 길을 찾아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다음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가 할머니 댁으로 날 내려주었는지 아닌지. 어떻게든 길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울고 있는 여자아이의 이미지만 남아있다. 그 길은 일 년 후 전학을 간 내가 매일 다니는 길이 되었다. 결혼 후 신랑과 같이 걷기도 했다. 신랑에게 그때의 상황은 말하지 않았지만.

이십 년이 훌쩍 지났다. 글로 써 내려가며 그때의 나를 안아줄 용기를 내어본다. 뱀의 공포를 뱀을 만지며 극복하듯 나의 공포를 끄집어내어 소리 내고 기록해 봄으로써 더 이상 공포가 아닐 수 있기를 바라본다.



그랬습니다. 집은 제게 폭력과 불안의 공간이었습니다. 성인이 되기 전 약한 존재들이 집 다음으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학교입니다. 그만큼 큰 영향을 주는 곳이지요. 그렇기에 학교에서 어떤 교사를 만나느냐는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 굉장히 중요합니다. 집과 학교 두 곳 모두안전하지 못하거나 상처만 주는 공간이라면 몸과 마음은 온전히 성장할 수 없습니다. 즉, 아이들이 기댈 수 있는 공간이 어디에도 없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들의 삶은 세워지기도 전에 무너지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학교는 어떤 곳이었나요? 좋은 선생님을 만나 삶이 바뀐 경험이 있나요? 혹은 최악의 교사를 만난 적이 있나요?

내가 어느 가정에서 태어나는지는 우연입니다. 선택권이 없지요. 그저 이 생에 던져졌을 뿐입니다. 자기 앞에 저마다의 생이 탄생하게 되지요.

학교에서 누구를 만나느냐까지 운에 맡겨진다면 조금 슬퍼집니다.

학기 초를 떠올려 볼까요? ‘제발 저 선생님만은 아니길’, ‘제발 저 선생님이었으면’, ‘내 단짝 친구와 같은 반이 되기를’ 등등 기대와 설렘 불안과 초초 등의 감정을 느껴보셨겠지요?


물론, 각자가 원하는 사람들만으로 이루어진 학급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선택권이 있다 하더라도 다양한 경우의 수가 존재하기에 어느 정도 불만도 따라오게 마련이지요.


그러나 저는 아이들이 ‘이 선생님만은 피했으면’하는 그 마음의 수와 강도가 최소한이 되었으면 합니다. 

물론 우리는 알지요.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요. 국민 개그맨 ‘유재석’님도 많은 사람들이 호감을 갖고 있겠지만 누군가에게는 호감의 존재가 아닐 수도 혹은 괜히 싫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6학년과 고3 담임선생님, 단 두 분을 제외하고는 정당한 이유 없이 학생에게 언어적, 신체적 폭력을 행사하거나 스승의 날이 되면 선물을 당연한 듯 챙기거나, 1년의 충분한 시간이 있음에도 자신의 반 학생의 이름조차 외우지 못할 만큼 학생에게 무관심한 교사들을 연달아 만났습니다.


6학년 담임선생님은 교사가 된 지 얼마 안 된 이십대 중후반쯤의 나이셨어요. 특별히 잘해주셨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선생님을 만난 첫날 하셨던 다음의 말은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다른 선생님들이 여러분에 대해 어떻다는 말을 해주려고 하셨지만 듣지 않았어요. 작년 생활기록부도 보지 않았고요. 어떠한 편견 없이 여러분을 만날 거예요.”


우리를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하겠다는 말씀이 참 반가웠고 뭔지 모를 기대를 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저도 아이들을 만날 때 선생님 같은 마음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게 되더라고요.


고3. 한참 예민한 여고생들을 따뜻하게 품어주셨던 당시 담임선생님은 여전히 연락을 드리는 유일한 선생님입니다. 반장이었던 저를 많이 챙겨주셨어요. 모든 반 친구들이 참 많이 좋아했던 분입니다.

여러 좋은 말씀을 해주셨는데, 유독 기억에 남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은 서로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같은 곳을 바라보는 거예요.”

제 학생들에게 종종 저도 써먹는 말이 되었습니다. ㅎㅎ


저는 리버럴한 사람이지만 유독 굉장히 엄격한 부분이 하나 있어요.

‘아무나 교사가 되면 안 된다.’입니다.


모든 부모에게 좋은 부모가 되라도 강요하기에는 쉽지 않지만 교사는 ‘더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교사’라는 추상적 명제에 대해선 사람마다 다른 기준을 갖고 있을 거예요.

그러나 아이들의 상황에 무신경하거나 상처 주는 말을 툭툭 내뱉거나 자신의 권위만 내세우거나 아이들이 어떻게 배울 때 잘 배울 수 있는지 전혀 고민하거나 노력하지 않는 교사를 좋은 교사라고 말하지는 않을 거예요.


가정이 저에게는 불안의 장소였기에 학교라는 공간이 더 중요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정의 불안을 경험했기에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교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교사들에게 받은 실망감 또한 되려 아이들을 공감해 주고 지지해 주는 좋은 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저는 교사가 되었습니다.



이후 내용은 다음 편에 서술하겠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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