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팔리아먼트 라이트 한 갑 주세요."
편의점에 가는 가장 잦은 이유는 담배다.
담배를 입에 물기 시작한 건 1993년 11월, 2차 대입수학능력시험을 마치고 난 직후였다.
멋을 부리기 위한 것도 아니고, 호기심 때문도 아니었다.
그냥 때가 되면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에 가듯, 담배를 피울 당연한 시기가 왔다고 생각했다.
대학에 들어가며 담배의 여러 종류만큼 그 맛과 향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처음엔 말보로 레드의 고단한 맛과 살렘(세일럼)의 상큼한 도회풍 향을 좋아했다.
한두 달 지나자 호기심이 더 깊어져, 학교 앞 자취방 앞에 있던 담배자판기의 모든 제품을 모조리 시연해 봤다.
필립모리스는 명성에 비해 그저 그런 삼류 건달 같은 맛이었고, 낙타고기맛이 날 것만 같던 카멜은 텁텁한 사막 모래 같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모어(more)라는 긴 담배였다.
함께 살던 나의 피 안 섞인 형제 현봉 형이 설명해준 유래를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미국 어느 교도소의 한 사형수에게 죽기 전 소원을 물었는데, 그는 담배 한 대를 원했다.
타오르는 담배연기에 지난 날을 떠올리며, 후회와 반성과 아쉬움, 진정 소중한 것들의 가치를 깨달았으리라.
하지만 한 개비 담배는 금세 재로 타들어 가고, 죄수는 탄식한다.
"Please give me more time..."
이를 애닳프게 지켜본 신부가 사형수들의 마지막 순간을 위해, 좀 더 긴 담배를 고안했다고 한다.
죄수들의 씁쓸했던 삶처럼, 목이 따가울 만큼 독하다.
가격도 94년 당시 1,300원.
700원이던 88라이트의 거의 '2 more times'였다.
대신 길이는 3cm 가량 더 길고 굵기가 날씬했다.
나중에 독일의 최고급 담배 다비도프(3,000원), 종이 대신 담뱃잎으로 담배를 만 골든포인트 같은 담배들도 대해봤다.
그저 그랬다.^^;;
서른 무렵까지 이러한 호기심은 지속되다가, 레종과 던힐라이트를 거쳐 팔리아먼트 라이트에서 멎었다.
내 나이 서른넷 때였다.
담백하고 세련된 맛에 익숙해졌다.
이후 나의 담배 취향은 7년째 그대로다.
이제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는다.
그냥 친숙한 그 맛과 편안한 그 향이 좋다.
사람 사귐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순수하고 호기심 많던 시절이 지나니, 지금껏 좋았던 사람들을 염두에 두게 된다.
이러한 모습이 진리나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괸 물은 흐려지기 마련이고, 스스로 울타리를 쌓는 이에겐 거기까지만이 자신의 세계일 테니까.
그런데 말이다.
언제부턴가 화려하고 진귀한 것보다 친숙하고 정겨운 것들에 마음이 더 끌린다.
이 마음이 실수든 오류든, 사람이 나이 들며 갖게 되는 본능적 성향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편의점 계산대 앞에서 신제품 담배 홍보판을 보다가, 별생각을 다 한다.
벚꽃이 흐드러진 여유로운 주말이라, 잡생각이 깊어지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