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풀 Nov 10. 2023

[부대찌개 투어] <하나> 동두천 가는 길

프롤로그 이후 반 년도 넘어서

4월 30일 일요일, 노동절 연휴라 마음이 넉넉하다.

부대찌개 투어의 첫 번째 목적지인 동두천에 가는 날, 푸른 듯 흐린 하늘빛이 옷차림에 고민을 던진다.

우산을 챙겨야 하나, 들고 다니기 번잡한데?

점퍼를 걸칠까, 낮엔 더울 텐데?

슬링백을 벗고 배낭을 짊어진다.


시엔형과 황쿠쿠와는 정오에 동두천중앙역에서 접선할 예정이다.

지하철 7호선으로 도봉산역까지 가서 1호선 소요산행 열차로 갈아타는 루트를 잡았다.


사가정역을 지날 무렵, 톡을 주고받다 보니 알게 되었다.

황쿠쿠가 같은 열차 다른 칸에 타고 있다.

몇 칸 앞으로 이동하니 슬램덩크의 변덕규 같은 미니 킹콩이 앉아 있다.

황쿠쿠다.


자상하게 무뚝뚝한 아부지답게 늦둥이 아들 지후를 데려왔다.

올해 9세인 지후는, 일에 치어 팍팍했던 황쿠쿠의 삶에 구세주, 아니 구세자 같다.

가끔 철강왕 카네기보다 강철 같고 진지했던 모습이, 많이 다정해진 걸 느낀다.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던 그 시절, 우리도 아홉 살 인생이었다.


두런두런 도란도란 이야기에 어느새 도봉산역에 도착했다.

소요산행 열차에 오른다.

연휴의 한가운데라 차안이 대체로 한산하다.

등산객 무리를 지나, 한적한 곳에 자리잡고 앉아 말을 건넨다.


“얼마 전 합스부르크 왕족들의 초상화를 다룬 글을 읽었는데, 신기하더라. ‘합스부르크 턱’이라고 불리는 돌출턱의 원인이 근친혼 유전 때문이래.”

“고귀한 사람들이 안 고귀해 보여서 고민했겠네.”


“그 턱에 몰린 시선을 분산시키려고 깃이 목 위까지 올라오는 옷을 즐겨 입었고, 심지어 모습이 왜소하고 기괴한 애완동물인간을 데리고 다녔나 봐. 그런 모습 그린 초상화도 많았고.”


“하긴, 오스트리아에서 스페인까지 뻗어나가면서, 그 많은 사람들 놔두고 가까운 친족들끼리만 번식했으니. 근친 기형이 나타나는 건 자연의 섭리일지도 모르겠다.”


황쿠쿠에겐 배울 점이 많다.

특히 역사와 문화 분야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다.

심지어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항상 공부한다.

대체 환갑 땐 뭐가 되려는 건지~


“‘합스부르크’ 어감은 합죽이 같은데, 뜻은 ‘매의 성(Hawk’s Castle)’이라네. ‘부르크’, ‘베르크’, ‘버그’가 다 성이란 뜻이니까. 만약 매부리코가 유전됐다면, 동네 이름을 바꿨을 것 같지 않아?”


“여러 지역에서 근친혼을 계속한 배경도 생각해 보면 어떨까 싶어. 단순히 의학적 무지와 아집만은 아니었을 거야.”


“신라 성골이랑 이집트 클레오파트라네 프톨레마이오스 왕가 얘기하는 거지?”


“지금 시각으로 보면 당연히 무지의 소치겠지만, 그 시절엔 통치세력이 신성한 존재였고 거기서 불순한(?) 피가 섞이면 특별한 핏줄이란 상징성이 오염됐을 거야. 어찌 보면 논리를 부여하기 위해 울며 겨자를 먹었던 걸지도 모르지.”


황쿠쿠는 대단한 친구란 생각이 한층 더 굳어진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 시절엔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거야. 반대로 지금은 아닌 걸 과거의 고정관념으로 옳다고 고집할 수 없는 것 같다.”


꽉 막혔던 오랜 체증이 한꺼번에 내려가는 듯 명쾌해진다.


“그나저나 ‘합스부르크 턱’은 혈우병이랑 비슷하네. 왕족 유전병이니까.”


황쿠쿠가 화제 확장에 시동을 건다.


“혈우병도 근친번식이 원인이야?”


“혈우병의 원인이 근친혼이었고, 영국 왕조의 공주들이 유럽 여러 나라 왕비로 시집가면서, 2세 왕자들의 혈우병이 유행이었대. 빅토리아 여왕이 대표적인 혈우병 보인자였고.”


갑자기 혈우병의 뜻이 궁금해진다.


“혈우병이란 말의 뜻은 뭐야?”


누가 뭐라고 말하지 않고도, 우리는 한자사전과 영어어원사전을 뒤적이기 시작한다.


“혈우병(血友病), 피 혈, 벗 우, 병 병. ‘피의 친구가 되는 병’이야?”


신대두의 원초적 질문에 황쿠쿠가 분석을 시작한다.


“영어로는 헤모필리아(hemophilia), 헤모가 피, 필리아가 사랑. 흡혈귀, 뱀파이어는 아닌 것 같은데.”


긴 침묵이 이어지고 폰을 뒤적대는 손가락이 분주하다.


“필리아를 기질, 경향(tendency)으로 해석하면 답이 나올 것 같은데…”


쿠쿠가 실마리를 풀기 시작한다.


“오!!! 헤모를 혈액(blood)가 아니라, 출혈(bleeding)으로 해석하면?”

 

신대두가 바통을 이어받는다.


“아!!! 피를 계속 흘리는 성질의 질환!!!”


“그럼 혈우병(血友病)의 우(友)는 친구가 아니라, 어떤 증상을 지속하려는 성질로 해석해야겠네!”


황쿠쿠의 유레카와 동시에 지하철 안내방송이 나온다.


“이번 역은 동두천중앙, 동두천중앙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30분이 훌쩍 달렸다.

어원풀이도 벗과 함께하니, 길이 넓어지고 속도가 붙는다.


“아빠, 이번에 우리 내려요? 아빠랑 삼촌이랑 되게 신나 보여요.”


아홉 살 지후가, 아빠와 삼촌에게 뽀송뽀송한 웃음을 선물한다.

동두천 부대찌개가 유난히 맛깔스러울 것만 같다.

To be continued…

작가의 이전글 [고맙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