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레지던스를 끝내고 월세살이 시작
3주에 걸쳐 한국에서 컨테이너박스에 실려온 짐들이 도착하였습니다. 호텔 레지던스에 머물러야 할 4주가 끝나가고 있습니다. 제 기분을 불안하게 만들었던 시간들도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누런 빛이 낮게 깔린 레지던스 방에서 복작복작 네 가족이 지내던 시간들이 끝나갑니다.
개인적으로 견디기 힘들었던 이 공간에서 벗어나는 날을 기다렸던 저는 이상하게 실감이 크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이 공간에 미운 애착이 생긴 것인지 아내에게는 "나 이제 이 공간에 익숙해지는 것 같아"라고 이야기했다가 어이없는 웃음을 저에게 던졌습니다. 밤만 되면 밖으로 나가 걷던 뛰던 탈출하려고 하는 저를 계속 봐왔기 때문입니다.
이삿날이 다가옴에 우리는 네 가족이 가져온 5개의 캐리어를 다시 싸 넣습니다. 여기저기 섞이고 또 짧은 기간이지만 살면서 쌓인 식료품과 아이들 장난감들이 있으니 이게 또 늘어나 누구의 짐인지 작전을 잘 짜서 캐리어에 차곡히 넣어봅니다. 생각보다 일찍 짐 싸는 것이 끝나 10시에 끝이 났습니다.
묘한 감정이 일어납니다. 레지던스 방에 있으면 우울한 기분이 들기에 머물기 싫어 아이들이 자면 시내 도로를 1시간가량 걷거나, 통일궁 주변을 30분씩 뛰었습니다. 트인 공간에서 바깥공기를 마시는 게 숨 쉬고 있는 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처음 있었던 이 공간을 왜 어둡고 좁게만 느꼈을까요. 새로 정착해야 할 이곳에서 적응하는 새로운 도전이 무겁게 다가온 것일까요. 여기에 온 대부분의 가족들의 남편들과는 다른 남편으로서의 '나'의 역할에 스스로를 작고 초라한 모습으로 바라본 걸까요. 걷고 뛰는 동안은 이런 생각들이 사라지긴 했고, 그래서 늦은 밤에도 움직였습니다.
이삿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아침이지만 해가 참 밝고 오전 9시 벌써 30도가 되었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은 마지막 호텔 조식을 서둘러 챙겨 먹고 출발하고, 저는 전 날 싸둔 캐리어 5개와 식재료 봉지를 가지고 승합 택시를 불러 짐을 싣고 새 집으로 출발합니다. 아내가 구해놓은 집이기에 저는 한 번도 보지 못했기에 조금 걱정은 있지만 설레었습니다. 저보다 부동산에 있어서는 탁월한 결정력이 있는 아내입니다.
삐삐 삐삐삐. 부동산 중개사와 함께 들어가 봅니다. 하얗습니다. 한국 집에서 가구와 가전을 다 들고 와야 했기에 가구 가전이 없는 '노옵션'집으로 선택을 했습니다. 바닥도 하얀 대리석, 부억도 하얀 서랍장, 벽도 이번에 새로 하얗게 칠해져 있습니다. 도화지 같은 집입니다. 우리의 짐으로 잘 꾸며야 합니다.
이삿짐이 도착했습니다. 다행히 한국분이 계셔서 전체 진행과 한국에서 보낸 박스 숫자를 함께 세면서 짐을 옮깁니다. 큰 소파도 3개로 나눠 포장하고, 식탁도 1개로 포장해서 모든 포장이 170개입니다. 그리고 베트남 분들이 짐을 옮기시는데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여기서는 한국 냉장고가 초대형이고, 드럼세탁기도 미니워시까지 달린 초대형입니다.
점심시간입니다. 새로 이사 온 동네는 시내와는 거리가 조금 있는데, 한국분들이 좀 사는 곳이라서 그런지 한국식당들이 조금 있습니다. 메뉴를 골랐습니다. 이삿날 특집 순댓국입니다. 짜장면과 탕수육은 잘하는 집은 멀지만 한 달 만에 국밥입니다. 속이 뜨끈해지는 게 나쁜 기운이 나가고 좋은 기운이 집으로 들어오는 느낌입니다.
5시간의 이사가 끝났습니다. 이제 남은 건 더 오래 걸리는 뒷정리입니다. 입주자 마음에 드는 이삿짐센터는 이사 인생 4번 동안 한 번도 없었지만, 이번은 더 오래 걸릴 듯합니다. 미련으로 버리지 못하고 가져온 옷들과 잡동사니들이 들어갈 곳 없어 버려야 하고, 필요한 집기를 더 사야겠습니다.
그래도 기분이 좋습니다. 유치원도 바로 옆이라 아이들을 데리러 갔다가 걸어서 집에 오니 기분이 좋은지 방방 뜁니다. 대리석이라 무척 위험하여 다그쳐도 좋은 마음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한국 집보다 약간 넓어졌지만 아주 큰 수영장이 있고, 작지만 실내 어린이 놀이터가 있으니 아이들의 발이 계속 뛰어다닙니다. 아주 피곤해질 것을 생각하니 내심 흐뭇합니다.
진짜 새 보금자리까지 새로운 시작의 모든 조건이 갖춰졌습니다. 이제 좋은 일들만 앞으로 우리 집에 깃들기를 오랜만에 기도를 하고 잠에 들어 보겠습니다. 웃음과 사랑이 가득 찬 우리 집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