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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사서 Aug 27. 2022

이 직업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


각 반에는 유독 집요하게 한 과목을 파고드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게 바로 나였다. 학부시절 내 구애를 받던 과목은 전공인 '문헌정보학' 중  '문헌'의 근본,  '자료조직'이다.



자료조직은 다시 '분류'와 '목록'으로 나눈다. 간단하게 '분류'는 도서관 책등에 붙어있는 숫자 기호를 정하는 방법, '목록'은 이용자들이 소장도서 검색을 쉽게 하고 사서들이 책 관리가 편리하도록 책에 대한 모든 정보를 작성하는 방법을 배운다. 졸업한 지 오래된 자타공인 자료조직 덕후는 요새 규칙이 주는 아름다움, 목록에 꽂혀있다.



책에 대한 정보를 한 장으로 작성하는 '목록'은 모든 도서관에서 공유하기 위해 공통 규칙이 정해져 있다.  00x-99x에 까지 숫자에(우리는 이를 필드 혹은 태그라고 부른다)에 어떤 내용을 적을지 정하고, 각 필드마다 숫자로 된 지시기호, 알파벳으로 된 식별기호를 구분해 무슨 정보를 어디에 적어야 하는지 정해 놓았다. 옛날에는 손바닥만 한 카드에 사서들이 일일이 이런 내용들을 적어 목록함에 넣어놓았지만 지금은 기계가독형목록(MAchine Readable Cataloging, 일명 MARC)으로 자료관리 프로그램에서 작성한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칼세이건의 '코스모스'의 MARC


MARC 한 장에는 책의 모든 정보가 담긴다. 책의 제목, 저자부터 출판연도, 페이지수, 삽화나 표가 들어있는지 여부, 총서명과 번호, 원서명과 언어 등등. 위의 예시 중 245 필드는 표제와 책임표시 사항을 적는 필드로,  a자리에는 표제(서명),  d자리에는 첫 번째 책임표시(주로 저자),  e자리에는 두 번째 이하 책임표시(공저자, 그린이, 옮긴이 등)를 적는다. d와 e가 공저자라면 그 사이를 콤마(,)로 구분하고 d와 e가 역할이 다르다면(저자와 그린이, 저자와 옮긴이 등) 그 사이를 세미콜론(;)으로 구분한다. 숫자와 기호로 최대의 효율을 출력하는 것은 효율에 미친 자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자료조직 덕후이자 효율에 미친 자는 생활에도 목록을 적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생활 카테고리 안에 병원이 있고 병원 안에 치과, 안과, 내과 등으로 나누고, 방문일, 통증, 의사와의 면담 내용, 처방, 약값과 병원비, 피드백을 적는다. 줄글로 쓰는 기록보다 카테고리를 나누고 그 안에서 규칙을 정해 기록하는 게 마치 적금통장에 돈이 쌓여가는 것처럼 뿌듯하다. 그리곤 가끔 할 일이 없을 때 넘버스(아이클라우드의 엑셀 기능)를 열어 '이번엔 어떤 카테고리를 만들어서 어떻게 효율적으로 채워볼까'하며 각 폴더를 한 번씩 순방한다. 새 시트를 만들어서 생각하던 것을 차곡차곡 정리하는 짜릿함이란...! 



공공도서관이 독서와 문화 사업을 얼마나 하는지도 모른 채 자료조직 하나로 이 직업에 발을 들였다. 자기 직업에 100% 만족하는 사람이 있긴 한 걸까 싶지만, 그 지겨운 일 중에서 이것만큼은 재밌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정말 병아리 눈물만큼이라도 있기에 우리는 직장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 같다. 



내게 자료조직은 그래도 코끼리 눈물 정도는 될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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