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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탕 Oct 31. 2020

제주 숲 말고 네온사인

숲보단 네온사인이 좋다.

돌발적으로 내린 버스 정류장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궁금해서 인터넷으로 검색했는데 그사이 버스가 개편을 해서 755번 버스는 없어졌다고 한다.

버스에 내려 걷다 보니 사람들이 하나 둘 보이고 건물엔 네온사인이 번쩍번쩍하다.


나:너희들 왜 아무 말이 없어?

불안이:...

강박이:...

나: 너희 떨고 있니?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내린 것 같지만 큰 건물이 보여서 내렸어.

불안, 강박이:변명 따윈 때려치워!


가게가 밀집한 거리에서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나는 미용실이나 슈퍼, 옷집 간판이랑 요란한 불빛을 뿜어내는 네온사인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난 숲보단 네온사인이 솔직히 마음이 편하다.

시력이 별로인 나는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니 커다란 병원 건물 옆에 도로와 사거리가 보인다. 그 옆으로 유명한 S호텔에서 왁자지껄 관광객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불안이: 아휴, 이제 살겠네.

나:그렇지? 나 다 생각이 있었지?

강박이: 그건 모르겠고 너 오줌 안 마려워?

나: 마렵지. 참고 있어.


컴컴한 밤에 숲이나 바닷가 앞에서 내리지 않아 정말 다행이야. 사람이 가득하고 네온사인이 번쩍번쩍한 거리가 이리도 반가울 수가 있는지.

모험심을 안고 무작정 내린 동네가 그냥 그렇고 그런 흔한 도시에 있는 시내라 누군가에겐 시시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너무도 안심이 됐다.

삼자: 아이고, 이 쫄보야...

제주에 왔으니 '맛있는 걸 한 번 먹어볼까?’

노랑, 주황 야광 불빛 뿜어내는 네온사인이 내리쬐는 거리와 골목을 걸었다.

식당을 찾기 위해 몇 바퀴를 돌았는지 모른다.

길거리엔 옷 가게, 화장품 숍, 카페뿐.

골목 안을 들어서면 대형 식당이나 술집, 노래방은 엄청 많다.


삼자: 언제는 사람이 있어서 좋다더니?


혼자 조용히 앉아서 먹을 만한 곳은 없을까? 시내 몇 바퀴를 돌았지만 딱히 갈만한 곳이 보이지 않는다. 햄버거는 과민한 나의 장이 싫어할 것 뻔하고 제주까지 와서 패스트푸드로 배를 채우기 싫다.

'좀 더 걷다 보면 혼자 조용히 낭만을 때릴만한 밥집이 나올 거야'

긍정적인 마음으로 걷고 걸었지만 같은 자리만 몇 바퀴 빙빙빙, 아무리 걸어도 대형 횟집이나 고기를 파는 술집들이 대부분이었다. 고기를 좋아했다면 제주 오겹살에 소주 한 잔 걸쳤을 텐데. 고기는 영 안 땡긴다. 오늘따라 술 생각도 없다.

사실 배가 고픈 것보다 다리가 너무 아팠다.

‘난 지금 내 엉덩이를 앉힐 의자가 필요해.’

나는 절대로 ‘저기는 안 가야지’ 했던 흔하디 흔한

우리 동네뿐 아니라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그런 커피 체인점에 앉아있다.(엉엉)

핸드폰으로 맛 집 검색을 하면 될걸, 왜 이리 고생하냐고? 맛 집이면 사람도 많고 혹여라도 줄이라도 서면 정말 싫다. 먹기 위해 줄 서는 거 많이 귀찮다.


여기서 잠깐,

나도 나만의 카페나 식당 고르는 법이 있다.

첫 번째 , 가장 중요한 것은 맛보다 화장실이야. 특히 가게 내부에 있어야 해. 건물 밖 화장실, 절대 노노.

두 번째, 화장실의 청결이야. 난 비위가 약해서 더럽고 냄새나는 화장실은 너무 힘들어. 내가 싼 똥 보고 토할 뻔했으니 말 다 했지.

세 번째, 조용 한 곳이면 좋겠어. 사람이 빈틈없이 빽빽이 앉아서 먹는 식당은 별로야. 음식을 느긋하게 먹을 수 없고 다음 사람에게 바통을 넘겨줘야 할 것 같아서 빨리 먹게 돼. 식후엔 속이 불편해서 소화제를 찾게 되더라고.

네 번째, 음식의 맛인데 난 그냥 맛없지만 않으면 돼. 맛있으면 베리 베리 왕 땡큐 지만.


누군가 1:야, 그냥 집에서 밥 먹어.

누군가 2: 그럴 거면 여행 뭐 하러 다니는 거냐?

나: 누군가에겐 맛이 정말 중요할 수 있겠지만 나에겐 화장실이 먼저야. 왜냐면 나의 불안이와 강박이가 그것을 원하거든.


배가 고파서 어쩔 수 없이 안 좋아하는 빵과 쓴 커피를 마셨다. 밤에 카페인 먹으면 잠 못 잘 텐데 어쩌지 라는 걱정과 함께 딱히 할 일도 없어서 스케치북과 펜을 꺼냈다.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사람들이 빽빽이 앉아서 커피 마시고 수다를 떤다. 카페에서 그림 그리기 너무 하고 싶었지.

사람도 많으니까 여기서 그려보자.

아쉽게도 카페에서 그림을 못 그렸다. 아직도 내 오른손이 부끄러워해서 말이지. 홍홍

사실은 내 앞에 앉아 있는 중년 남성분이랑 내 옆에 앉아 있는 여고생들이 자꾸만 쳐다보잖아.


삼자: 변명 오지고요.

나: 사실 내 앞에 앉아 있는 중년 남성분이랑 내 옆에 삼삼오오 수다 떨던 여고생들이 자꾸 나를 쳐다보더라고.

삼자: 그 사람들 너한테 관심도 없을걸?

나: 쳇.



이제는 추억의 버스 755번


제주 시내를 걷다 만난 돌하르방 삼형제:)
제주  여행하며 드로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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