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탕 Oct 29. 2020

해녀브런치를 즐기며 그림 그리기

그냥 아침에 일어나서 가고 싶은 대로 가자

“그냥 아침에 일어나서 가고 싶은 대로 가자”


일상생활에서 꼴리는 대로 살지 못해 여행만큼은 내 멋대로 하고 싶었다.

늦잠을 실컷 자고 오전 11시쯤 버스터미널에 앉았다. 내 머리 위에 높이 있는 버스 시간표를 봤다. 온통 숫자들뿐, 도대체  어떻게 읽어야 하는 거야? 숫자를 계속 올려다보니 현기증이 올라온다. 그래서 시간표 보는 것은  깔끔하게 포기했다.


배가 고파 버스 터미널 주변 식당을 몇 바퀴 배회하다가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해 다시 터미널로 들어왔다.

그런데 맛있는 냄새가 솔솔 나서 따라가 보니 어묵과 떡볶이를 파는 작은 분식집(포장마차에 가까웠다)이 있었다. 어묵 2 꼬치와 국물 한 컵을 호호 불며 마셨다. 추운 날 따끈따끈한 어묵 국물이 정말  꿀맛이네. 여기가 제주 맛집일세.


 ‘ 어디 가지?’


 배를 채우고 다시  버스가 들어오는 곳에 멍하니 앉았다. 그 복잡한  시간표를 또  볼 자신은 없기도 하고 보고 싶지도 않다.

가만히 살펴보니 버스 여러 대가 줄지어 서있다. 맨 앞 755번 버스 기사님께 물어보니 10분 후 출발이란다.


불안이:어머? 얘가 왜 이래?

강박: 너 화장실은 다녀왔어?

나:아니?

불안이:어디 가는지는 알아보고 타야지

강박이: 너 오줌 마려우면 어떡하려고 그래.

 나: 버스 종점 모슬포항에 가 볼래.

불안이: 거기 2시간은 가야 할걸, 너 멀미도 하잖아.

강박이: 내렸는데 화장실 없으면 어쩌려고?


 모슬포항에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버스 앞에 종점 모슬포항이라고 쓰여 있길래 그냥 말해본 것뿐인데 가버릴까? 한 번 질러봐!

그렇지만 나는 겁쟁이다. 두 녀석들의 성화에 모르는 척하며 모슬포항은 슬그머니 포기, 한 시간가량 버스를 타고 사람도 드문 드문 보이는  초록 밭에서 하차했다.


불안이: 뭐라도 하나 퍼부을 것 같은 회색 하늘이야

나: 걱정 마, 내 가방 안에는 3단 우산이 있다고.

강박이: 화장실 먼저 찾아서 미리 볼 일 보자.

.


초록 초록한 낮은 키의 나무라고 해야 하나? 작은 나뭇잎이 줄지어 있는 이곳은 녹차 밭, 제주 오설록 티 뮤지엄이다. 예전에 보성 녹차밭을 봐서 그런지 큰 감흥은 없었다. 그래서일까? 녹차밭 사진이 단 한 장도 없다.

뮤지엄 안에 들어가 생각지도 못한 녹차 시음도 하고 박물관 구경도 했다. 난 녹차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데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는 걸까?라는 생각을 하며 걷다가 현무암 돌을 붙여놓은 건물로 이동했는데 이 곳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난다. 익숙한 초록색 이니스프리 로고가 보이고 안으로 들어가니  화장품 진열대 옆으로 널따란 원목 테이블이 보였다. 커다란 통유리 창문으로 햇살이 눈부시게 들어온다. 아, 여기서  커피 마시면서 그림 그려야겠다.


점심으로 해녀 브런치 비빔밥을 먹으며 그림을 그렸다.  생각처럼 그림이 잘 안 그려진다.

‘에잇, 먹는 것 앞에 두고 뭐하는 짓이야, 밥 먹고 커피 마시며 다른 거 그려야겠다.’

스케치북을 은근슬쩍 덮고 온통 밥에 집중했다. 음식이 예쁘긴 한데 배가 안 부르다. 너무 양이 적다. 따땃한  커피를 마시며 보라색 파우치 안에서 물감과 펜을 꺼냈다.


그럼 본격 그림을 그려 볼까나!

음… 오늘따라 손이 안 풀렸나? 그림이 너무 안 그려진다.


창문도 크고 널따란 책상까지 그림 그리기에 최적의 장소인데 내 손이 마음대로 움직이지가 않는다. 잘 그리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큰 걸까? 그림이 잘 안 그려져 소심한 마음이 슬금슬금 올라온다. 이럴 땐 약을 쳐야 돼. 그건 바로 쇼핑이지. 음… 내가 사고 싶은 건 죄다 품절이다.(뭐 이리되는 게 없냐!) 쓸데도 없는 동백오일과  비누 만들기 키트랑 파란색 노트를 샀다.(나는 여행지에서 노트를 꼭 사서 모으고 있다. 노트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밖에 나왔는데 사람들이 나를 힐끔힐끔 보는 것 같다. 뭐야? 내 그림 본 거야?


나를 쳐다보다가 점점 다가오는 남자, 나에게 용무가 끝난 후 다른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미소를 한 바가지 날리며 다가온다.  이러면 거절할 수가 없잖아.

왜 자꾸 나한테 사진 찍어달라는 거야! 정말 짜증 나!

난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고 싶단 말이야.


둘러보니 주변에 혼자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 주로 커플이 많고 가족끼리 친구들끼리 하하호호 모두 함께였다. 같이 사진 찍히고 싶은 그 마음은 알겠는데 나도 좀 즐겨야지요. 이렇게 줄 서듯이 나에게 계속 사진 찍어달라고 하면 어떡해요. 이건 해도 너무 하잖소!

다음부턴  혼자 있는 사람에게 절대 사진 부탁 안 할 겁니다.


예쁘고 곱게 거절하기도 힘들어서 건물 뒤로 도망을 쳤다.   생각지도 못한 예쁜 산책로를 발견했다. 아름다운 것은 이렇게 뒤에 숨어 있구나. 여긴 사람도 없고 조용하다.    

그림을 그리다 내 발밑에 떨어진 빨강색, 주워보니 꽃 잎이다.

머리를 들어  올려다보니 빨강색 꽃들이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자세히 보니 동백꽃이다. 동백꽃이 이렇게나 아름다웠나?

한참 동백꽃의 아름다움에 취하려는 찰나


강박이:미리 화장실 가서 오줌 누고 와.

나:에이… 진짜, 왜 그래? 분위기 좀 깨지마.

불안이:이제 어두워지고 있어.

강박이: 버스 타고 숙소 돌아갈 준비 해야지.

나:벌써? 아직 그림도 못 그렸어.

불안이:겨울이라 해 금방 떨어져. 서둘러.

나:쳇. 더 있고 싶은데....



강박이가 하도 보채서 화장실 한 번 더 들렀다 755번을 반대편 정류장에서  탔다.

강박, 불안이:으아아악, 얘가 왜 이래?

그렇다. 나는 다시 한번 예고도 없이 모르는 정류장에서 내렸다. 그것도 엄청 깜깜한 밤에.


이전 04화 오늘만큼은 아이가 없는 곳으로 갈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