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박이랑 불안이
나는 제주도 간다
공항에 오면 꼭 하고 싶은 게 있었지. 비행기 기다리면서 비행기 그리기. ‘좋았어!, 내 실력을 뽐내 주갔어'라고 했지만 비행기 반 쪽은커녕 스케치북을 꺼내지도 못하고 비행기를 부랴부랴 탔다. 한 것도 없는데 면세점 한 바퀴 돌고 화장실 한 번 다녀왔을 뿐인데... 짐칸에 가방을 올려놓고 복도 쪽 내 자리에 앉아 창가 옆자리를 바라보니 부러웠다.
‘아, 아쉽다. 창밖으로 풍경 구경하면서 가고 싶었는데'
불안이, 강박이: 쯧쯧, 너의 과민한 장과 방광을 생각하렴
강박이: 그래, 네가 왔다 갔다 하면 옆 사람이 얼마나 불편하겠냐.
나: 화장실 안 가면 되지!
불안이: 그럼 넌 참다가 방광이 터지고 말 거야.
젠장, 이 녀석들 놓고 몰래 왔어야 했는데... 몰라, 난 너네 신경 끌 거야. 훠워이~ 저리 가셔.
그럼 이제 스케치북을 꺼내서 뭐라도 하나 그려볼까? 명색이 드로잉 여행인데 아직 한 장도 못 그려서 말이 되겠어. 무슨 펜으로 그림을 그릴지 필통 속 필기구들을 꺼내는데 내 옆자리에 앉은 중년 부인들이 나만 본다. 스케치북에 선을 하나 긋는데 앞사람도 뒷사람도 옆 옆 사람도 나만 봐, 스튜어디스도 나만 봐. 모두가 나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 부끄러워서 손이 움직이지가 않아. 그래서 또 한 장도 못 그렸다는 이야기.
혼자서 여행을 해 본 적이 없다고요?
나와 열 살 가까이 차이 나는 S에게 이 말을 듣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S는 이십 대 초반에 스페인을 혼자서 배낭여행으로 떠났다고 한다. 여행 다니다 잠잘 데가 없으면 노숙도 서슴지 않았다고. 며칠 후면 또 혼자서 유럽 여행을 할 계획이란다.
"언니, 참 의외네요. 혼자 여행 많이 했을 것 같아 보이는데...?"
그렇다. 나의 옷차림은 누가 봐도 지금 당장 어디 먼 길 떠날 사람, 즉 여행자의 차림새다.
늘 커다란 배낭에 짐을 잔뜩 넣고 어깨 한쪽에는 크로스백을 메고 다닌다. 초록 노랑의 포틀랜드 로고가 붙은 모자와 낡은 컨버스 운동화, 늘 찢어진 청바지를 즐겨 입는 나의 모습.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도 ‘오늘 어디 여행 가세요?’ 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정작 나는 여행을 혼자서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나 스스로 충격을 받았다.
아, 나도 혼자 여행 가고 싶다.
어쨌든 난 그 날부터 병이 생겼다. 밥을 먹을 때도 이를 닦을 때도 심지어 똥을 쌀 때도 내 옆에 가우디 아저씨가 늘 함께했다.
‘구엘 공원에 앉아 그림이나 좀 그리고 와’라고 자꾸만 내 귀에 속삭이는 가우디아자씨, 나도 가고 싶다고요!!
가우디 아저씨의 손을 붙잡고 나의 영혼이 스페인으로 막 날아오르는 순간 ‘땔롱’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2시 정민 정현 하원’.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두 살 터울 형제 녀석들이 집에 오는 시간. 이제 나는 그만 현실로 돌아와 엄마로 변신, 까만 고무줄을 찾아 머리를 질끈 묶고 가우디 아저씨를 내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