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도롱또똣한 드로잉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머릿속에서 갑자기 우도가 떠올랐다.
‘그래 좋아 오늘은 우도에 가는 거야. ‘
불안이: 지워, 그거 네 생각 아니야.
나:(이를 닦으며) 좀 떨어져.
불안이: 안 갈 거지?
제주의 날씨는 변덕이 심하다더니 파랗던 하늘이 갑자기 시커메지면서 물이 한 방울 뚝.
팔에 맞았다.
강박이: 너 우산은?
나: 걱정 마. 가방에 있어.
갑자기 쏴아아, 비가 중간이 없이 쏟아지네. 건물 1층 앞에서 비를 피했다.
강박이: 아까 가방 확인하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니?
불안이: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 예감이 안 좋아.
강박이: 다시 호텔로 돌아가자.
나: 싫어. 갈 거야. 우도!
강박, 불안이:으이구 , 고집쟁이!
근처 편의점에 들어가 우산을 사면서 ‘
이런 날씨에 우도 가면 어때요?'라고 물어봤더니 직원분이 눈을 커다랗게 뜨면서 우도는커녕 이런 날씨에 바닷가 근처는 얼씬도 말라고 한다. (괜히 물어봤어)
불안이:들었지?
나: 모른 척
강박이: 오늘은 그냥 호텔로 돌아가자. 가방 확인도 제대로 안 했잖아.
편의점 직원의 말대로 우도는 안 갔다.
불안, 강박이: 지지리도 말을 안 들어.
오늘도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탔다.
제주도는 아무거나 타도 바다로 갈 거야.
맨 앞에 있는 702번 버스를 타고 한담 역에 내렸다. 이곳을 사람들은 애월이라고 부른다. 애월이라는 이름이 너무 예뻐서 이곳에 왔다. 버스에 내려 조금 걷자마자 저 멀리 파란색 바다가 보인다.
언제 비가 왔을까 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하늘이 맑다.
‘제주 날씨의 매력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이지’라고 하늘이 말해주는 것 같다.
또똣한 보말 칼국수 한 그릇 때리고 싶지만 일단 동네 한 바퀴 구경부터 하자.
걷다 보니 커피잔이 커다랗게 세워진 노랑색 건물이 보인다. 바로 뒤엔 파도가 처얼썩.
처음 와 본 곳인데 난 왜 저 노랑 건물을 알고 있는 걸까?
아핫, 저것은 멘도롱또똣!
몇 년 전 강소라, 유연석 배우가 나왔던 드라마 제목이다.
' 멘도롱또똣'은 제주말로 '먹기 좋을 만큼 알맞게 따뜻하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여기 노랑색 카페가 드라마 촬영지, 진짜 카페 이름은 ‘봄날’이다.
바다를 보며 '멘도롱또똣'에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었지만 갑자기 다른 목적지가 생겨버렸다.
나의 목적지는 멘도롱또똣 바로 뒤에 우뚝 솟아 있는 짙은 회색 건물 ‘몽상 드 애월’이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내가 다녀간 2016년 1월엔 빅뱅의 지디가 몽상 드 애월 카페 사장님이었다.
나는 몽상 드 애월을 향해 힘들게 오르막을 걷고 있는데 사람들은 꺅꺅 소리를 지르며 오르막을 잘도 뛰어간다.
혹시? 오늘 지디 사장님이 오시나? 가끔 카페에 온다던데. 그럼 나도 뛰어야지!
제주도 오르막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그 힘들던 오르막을 단숨에 뛰었다.
‘헉헉, 지디 싸장님, 문 열고 들어가면 거기 있나요?’
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커다랗고 무거운 철문을 밀었다.
“어서 오세요.”
문 입구에 검은색 옷을 입은 직원들 사이로 내 눈이 데굴데굴 굴려봤지만 느낌이 쎄하다. 텄네, 텄어. 오늘 지용이 없어. 괜히 뛰었어, 배만 고파졌어.
지디 지용이는 없지만 사람은 겁나 많다. 특히 외국인 관광객이 어찌나 많던지, 지디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한 시간을 구석탱이에서 곱게 얌전히 찌그러져 있다가 드디어 창가 자리를 사수했다.
하마터면 가방을 던져서 자리를 맡을 뻔했지만 다행히 나는 우아하게 빠른 걸음으로 좌석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노랑색 '멘도롱또똣'카페가 보이는 전망이다. 아싸! 나에게 이런 좋은 자리를 맡을 운이 있다니, 밑겨지지 않는다.
강박이: 자, 이제 그림 그려야지.
나: 바다도 좀 보고 잠깐 즐기자고.
강박이: 잊었어? 너 그림 그리러 제주 온 거잖아.
나: (딴청)그런데 불안이 어디 갔지?
강박이의 성화에 드로잉북을 꺼내어 귀여운 노랑색 건물 '멘도롱또똣'을 그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지금은 사람들 신경이 덜 쓰인다. 어제는 누가 볼까 봐 노심초사하며 손이 부끄러워했는데 오늘은 보든말든 손이 기분 좋게 움직이고 있다.
제주 바다는 파란색보다는 비취색에 가까운 것 같다. 오묘한 비취색을 내기 위해 제주에서 한 번도 써 보지 못한 수채 물감도 꺼내어 색칠한다.
카페 명당자리에 오래 앉아 있다 보니 눈치도 보이고 배도 고파서 당근케이크를 주문했다. 요즘은 카페에 당근 케이크가 흔하지만 나는 당시에 당근으로 만든 케이크가 너무 신기했다.
그림을 다시 보니 배가 고파서 손을 덜덜 떨며 그렸던 기억이 난다. 케이크 맛은 기억이 안 나고 양이 너무 적어서 슬펐던 기억이 새록새록.
생각보다 그림이 잘 그려져서 나는 좀 더 담대한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불안이: 설마?
강박이: 가지 마! 그건 아니야.
구멍 뻥뻥 뚫린 현무암 위에 서서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며 아침 편의점 일이 떠올랐다. 제주 겨울바다를 가지 말라고 한 이유를 바닷가 앞에 가서 바람 따귀를 수차례 얻어맞은 후 알았다.
제주 바다가 나에게 ‘나를 우습게 보지 마’, ‘비가 멈췄다고 안심하지 마란 말이다’. 라고 경고를 준 것 같다.
눈에선 눈물이 줄줄, 코에서 콧물이 질질. 거친 바닷바람에 내 머리카락은 버드나무 풀어헤쳐 마구 묶어 놓은 일명 쑥대밭 머리가 됐다. 내 엉킨 머리 어쩔 거야. 엉엉
불안이: 바보 멍충이, 또라이
나: 불안이 너, 말이 너무 심하잖아.
아깐 안 보여서 좋더니!
바닷가 앞에서 딱 10분 버텼다. 스케치북엔 선 한 줄 못 그었다.
바다 전망으로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좋은 구경감이 됐을 거다. 아마 그 시간에 나를 모델로 누군가는 드로잉을 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