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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엽집 Oct 30. 2019

특색 없는 가스라이팅_<동주>

시라는 페미니즘

벗들과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와 함께 《시인/동주(안소영, 창비)》를 읽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 《시인/동주》에 실린 윤동주 시(詩) 중 한 편을 골라 읽고 어떤 생각이 드는지,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이 시는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지 이야기한다. 다양한 이야기들 속에서 시인 윤동주는 독립투사가 되기도 하고, 새로운 길에 설레는 청년이 되기도 하고, 치정극의 주인공이 되었다가, 살인자(?)가 되기도 한다. 사람 윤동주에 대한 다른 이의 해석도 볼 겸, 시대상황도 접할 겸 영화 〈동주〉를 봤는데 이토록 지루하고 진부한 해석이라니.     


〈동주〉는 동주를 규정짓는 일본인 고등형사(김인우 분)의 말로 시작한다. 동주(강하늘 분)는 겁먹은 순한 얼굴로 긴장한 채 자신을 규정하는 말들을 듣고 있을 뿐이다. 마치 법정에 앉은 피고 같다. 동주에 대한 몇 마디 규정 끝에 정작 핵심처럼 튀어나오는 것은 몽규에 관한 질문이다. 송몽규의 독립운동에 개입했느냐. 송몽규의 생각인가, 너의 생각인가. 고등형사의 질문은 마치 “네가 몽규를 망치지 않았느냐?”는 힐문처럼 들린다. “송몽규는 언제부터 알고 지냈지?”라는 질문을 받고 영화는 용정 시절로 플래시백한다.     

한 마을 사람이 공산당이 교회학교를 인민학교로 바꾸려 한다는 사실을 비판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몇몇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연설을 듣고 있다. 청중 중 한 사람이 “미국도 어찌 못하는데.”라고 토를 단다. 몽규 아버지가 공산주의에 비판적이지만은 않은 태도를 보이고, “공산주의가 어때서래?”라며 투덜거리던 몽규는 “아버지도 나도”라는 명분을 들더니 연설 중간에 끼어들어 어깃장을 놓고 도망친다. 그런데 청산리전투 운운하는 몽규의 연설은 맥락 없고, 정작 공산주의에 대한 이야기는 도망가면서 중얼거려 무슨 말인지 정확히 전달되지 않는다.

      

이 에피소드는 기능적으로 몽규가 얼마나 뛰어난 사람이었는지 보여주기 위해 배치되었으나, 〈동주〉가 아버지를, 시를, 시인 윤동주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몽규는 뒤따라 나온 동주와 함께 마을길을 달리다 어두운 창고로 숨어든다. 잠시 후 한 사람이 문을 박차고 들어와 “몽규가 신춘문예에 당선됐다”는 소식을 전한다.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아버지의 인정 덕에 어둠 속으로 들어간 몽규가 다시 빛 속으로, 아버지가 지배하는 집 안으로 당당히 돌아간다. 함께 있던 동주는 몽규가 받은 아버지의 인정을 통해 빛을 빚진다.       

 

〈동주〉에서 ‘아버지’라는 존재는 절대적이다. 몽규와 동주의 할아버지는 모두의 뒤에서 모두를 지켜보며 앉아 있고, 동주의 아버지는 늘 당신 아버지의 눈치를 살핀다. 아버지와 연결되어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몽규와 동주의 입지와 처신 역시 달라진다. 명동학교 선생님과 연결된 몽규는 정지용 시집을 얻어 동주에게 건넬 수 있고, 명의조 선생과 일대일로 만난 후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중국으로 떠난다. 명의조 선생을 설명하는 유일한 정보는 이렇다. “동경제대를 졸업하고, 신민회가 파견하고, 김구가 보낸 분.” 즉, 아버지가 보낸 사람. 

명의조 선생은 몽규에게 묻는다. “국가 구성 요소는 무엇인가?” 몽규는 “국토와 국민, 그리고 주권”이라고 답한다. 명의조 선생과 몽규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이며, 국가를 복원하는 것이 최우선의 목표이다. 그들에게 주권은 국가를 운영하는 근본적인 힘이 시민에게 있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 아니라, 국가라는 큰 아버지를 구성하기 위한 하나의 조건일 뿐이다. 중국으로 독립운동가라는 또 다른 아버지를 찾아 떠난 몽규는 ‘요시찰 인물’이 되어 또 한 명의 아버지, ‘고등형사’와 연결된다.     


고등형사는 몽규만큼 자신의 국가와 이념, 이상에 투철하다. 그는 진심으로 대동아공영을 믿는다. 몽규도 진심이다. 자술서에 서명하라고 했을 때 “이렇게 하지 못해 한스럽고 괴롭다”며 우는 몽규는 진심이다. 진심은 통한다. 그래서 몽규가 고등형사에게 대들었을 때 고등형사는 몽규의 뺨을 때리고, 몽규는 또박또박 정자로 자술서에 서명한다. 그 자리에서 둘은 지나치게 격정적이다. 반면 고등형사는 동주가 어떤 말을 하든 흥분하지 않는다. 그에게 동주는 몽규만큼 중요하지 않은 걸까.     


동주는 어떤가. 동주는 시(詩)를 쓴다. ‘사실’은 동주가 틈틈이 시를 쓰던 공책이 있었고, 징집되기 전 쓴 시들을 모아 세 권의 시집을 만든 후 벗과 가족에게 맡겼다는 것이다. 운이 좋게도 그 시집들 중 일부가 해방 이후에도 살아남아 우리에게 전해졌고. 하지만 〈동주〉에서 동주는 형제이자 아버지인 몽규가 만든 장(場) 안에서만 활동하고, 그의 절대적인 지배를 받으며, 진학과 유학 등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친아버지와 몽규, 그리고 할아버지라는 세 아버지의 허락을 구한다.     

신춘문예 당선 소식을 들은 날, 몽규는 토라져 있는 동주에게 “문예지를 만들자”고 제안하고, 윤동주는 몽규가 만든 문예지에 자신의 시를 싣는다. 연희전문에 가서도 마찬가지. 몽규가 “문예지”를 만들고, 동주는 그것에 시를 싣는다. 아버지에게 문과에 가고 싶다는 허락을 구할 때 카메라는 동주의 태도처럼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다. 동주와 아버지의 대화는 숏과 리버스숏으로 교차되는데, 동주에게 아버지는 거대한 산 같지만 아버지에게 동주는 나무에 매달린 불쏘시개밖에 되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곤란에 처한 동주를 몽규가 구출한다.     


몽규가 문예지를 만들고 그것에 윤동주가 시를 싣는다는 설정은 고등형사가 심문을 하고 동주가 답한다는 〈동주〉의 형식과 놀랍도록 닮았다. 네 이야기를 해. 단, 내가 만든 판 안에서. 동주는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판 밖에서 말을 할 생각도, 용기도, 의지도 없어 보인다. “등단도 못”한 동주는 정지용이 “시인”이라고 불렀을 때 시인이 되고, 다카마쓰 교수에게 다시 한 번 인정을 받으면서 시집을 낼 마음을 먹는다. 〈동주〉에서 동주가 시집이란 걸 낼 수 있던 것도 “아버지의 제자들”과 “영국 출판사”라는, 쿠미(최희서 분)를 통해 만난 아버지들 덕이다.      


몽규는 꾸준히 아버지와 연결되어 있지만 동주는 그렇지 않다. 아버지의 인정도, 아버지와의 관계도 없는 동주는 ‘독립’하는 대신 끊임없이 자신을 보호해 줄, 강한 아버지를 찾아 헤맨다. 몽규, 아버지, 할아버지, 정지용, 다카마쓰 교수, 그리고 영국. 다카마쓰 교수 수업 시간에 들이닥친 군인들은 교실에서 동주의 머리를 밀어버린다. 머리를 다듬는 다카마쓰 교수 집안에 징집과 전쟁을 선전하는 국가의 라디오 뉴스가 흘러나온다. 다카마쓰라는 아버지조차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하자 동주는 포기한다. 겨우 찾은 아버지조차 무력하니 징집을 피할 수 없다. 

〈동주〉 속 여성은 동주보다도 무력하고 존재가 미약하다. 여성들은 불쏘시개 동주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한 불쏘시개처럼 쓰인다. 연희전문에서 문예지를 통해 만난 ‘여진’은 글을 잘 쓰(는 것 같)지만 관객은 몽규의 평(評)만 들을 뿐 그녀의 글도, 이야기도 들을 수 없다. 대신 여진은 동주가 정지용을 만나는 징검다리로서, 정지용과 동향(同鄕)이라는 조건으로 동주에게 존재 의미를 갖는다. 때문에 동주가 아버지(정지용)을 만난 자리에서 그녀는 아무 말이 없다. 불쏘시개로 그 자리를 만든 것으로 그녀의 역할은 충분하니까.  

   

동주가 릿쿄대 진학 후 다카마쓰 교수의 수업에서 만나는 쿠미 역시 마찬가지. 그녀는 릿쿄대에 진학하고, 동주의 시를 알아볼 만큼의 문학적 소양이 있다. 하지만 그녀 역시 (다카마쓰 교수가 동주의 논문을 발견하지만) 다카마쓰 교수와 동주를 연결하는 불쏘시개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녀 역시 셋이 앉은 자리에서 말이 없다.) 쿠미는 여진보다 더 문제적인데, 쿠미는 “부모가 모두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설명된다. 부모가 없다는 조건은 영화 속에서 일본인 쿠미의 역사성을 희석하고, 유사 아버지와 남편으로서 동주와 다카마쓰 교수의 입지를 강조한다.     


몽규는 동주와 “문학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주제로 한 번 다투고, 여러 번 동주를 윽박지른다. 〈동주〉는 강하늘 배우의 목소리를 빌어 윤동주 시인의 시를 낭독함으로써 그의 시를 새롭게 조명했다는 평을 듣지만, 정작 〈동주〉 제작진들은 윤동주 시인이나 그의 시들엔 관심이 없는 듯하다. 윤동주의 시는 몽규를 둘러싼 윤동주의 심리를 표현하는 정도로 그치고, 시대적 소임을 고민하며 실천적으로 ‘시’를 택한 윤동주 시인을 남들 눈치나 보고 순응하는 유약한 존재로만 그린다.      

나아가 윤동주 시인의 어떤 시들은 아버지에 순응하지 않은 댓가로 시인이 (마땅히) 받는 벌처럼 묘사되기도 한다. 동주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알 수 없는 주사를 맞을 때 강하늘 배우가 낭독한 《병원》 구절이 보이스오버된다.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알지 못한다”로 시작하는 이 시는 시인 앞에 앉은 ‘늙은 의사’와 함께 의과 대학에 진학하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했던 ‘동주의 아버지’도 연상시킨다. 이 장면에서 동주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의과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벌을 받는 듯하다.      


‘의과’라는 모티브는 몽규가 재일조선인 유학생을 조직하려는 모임에서 반복된다. 몽규는 회합에서 재일조선인 유학생들이 군사훈련을 받고 배치된 후 군대 내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계획을 궁리한다. 흩어져 있는 조선인 장교들의 위치를 어떻게 파악하느냐는 질문에 “의과 출신 의무장교가 있으면 일본군 내 파견된 조선인 장교들의 위치를 알 수 있을 텐데.”라고 답한다. 직접적으로 동주를 언급하지 않지만 동주 아버지의 바람을 연상시키고, 동주는 본인이 적극적으로 의지를 밝혔음에도 모임에서 지속적으로 배제된다.     


영화가 묘사하는 동주의 죽음도 문제적이다. 누워 있던 동주가 피를 토하면서 일어나고 일본인 간호사와 군인들에게 끌려가는 장면 위로 《서시》가 흘러나온다. 이때 윤동주 시인의 “부끄러움”은 앞서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끄러워서” 자술서에 서명하지 못하겠다는 동주의 말과 맞물리면서 몽규처럼 국가를 위해 무기를 들지 않은, 그림자를 넘어서 보다 적극적으로 아버지와 동조하지 않은, 시를 쓰고 있었던, 시집을 내려고 했었던 시인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비춰진다. (쿠미에게 ‘아기처럼 발음을 가르치는’ 마지막은 어떠하고.)    

〈동주〉 제작진은 윤동주 시인과 그의 시와 문학에 유약함과 나약함, 의기소침함, 의존성 등의 이미지를 덧씌운다. 중국에서 돌아온 몽규가 동주를 윽박지르듯 너는 아직도 세상을 알지 못한다고, 어찌 그러냐고, 어떤 시대적 요구를 외면하고 내면이나 들여다보고 있을 거냐고 꾸짖는다. “니는 시를 계속 쓰라. 총은 내가 들 터이니까.”는 말처럼 층위를 나누고 역할을 구분한다. 몽규가 잡혀가는 장면과 동주가 전화기를 내려놓는 장면이 나란히 놓임으로써 동주가 밀고한 듯한 뉘앙스마저 풍긴다. 아버지들이 면회 왔을 때 동주는 죽었지만 몽규는 증언한다.       


〈동주〉는 윤동주 시인과 그의 시 세계를 형상화하면서 도리어 문학과 시(詩)를 모욕한다. 윤동주 시인과 문학을 모욕하면서 무엇을, 예를 들면 몽규라도 얻었느냐고 묻는다면 아니다. 〈동주〉 속 동주가 얇은 종이 한 장이라면, 몽규의 삶은 얇은 책장을 넘기듯 변한다. 시란 무엇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 다시 말해, 삶이란 무엇인가. 〈동주〉는 어느 것에도, 최소한의 예의도 차리지 않는다. 차라리 몽규의 독립운동기를 태원영화사처럼 스펙타클하게 그렸다면 더 유기적이었을 텐데. 〈동주〉는 세련되게 보이려 애썼지만 촌스러움만 부각시킨 가스라이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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