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출근 시간, 오늘도 잃어버린 나의 차를 찾아 망망대해 같은 아파트 주차장을 헤매는 중이다. 지하 1층 주차장에서는 '아차~어제 지하 2층에 주차했었나' 라며 기억을 더듬다가도 막상 지하 2층에 도착해서는 '아무래도 지하 1층인가?' 라며 발길을 되돌리곤 한다. 이렇게 지하 계단만 공연히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점차 확신은 사라지고, 대신 옛 어른들 말씀만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
혹시라도 며칠간 차를 쓰지 않았다면 다람쥐 쳇바퀴 같은 헛걸음은 더욱 심해진다. 당장 어제 주차한 곳도 생각나지 않는데 주말이나 연휴라도 끼어있다면 그야말로 오리무중이다. 다른 차들은 리모컨을 누르면 삑~소리와 함께 라이트로 깜박깜박 주차 위치를 알려주지만 오래된 내 차는 아쉽게도 그런 기능이 없으니 대신 머리 나쁜 차주의 기억만 깜박깜박할 뿐.
하여, 궁여지책으로 파킹 후에는 바로바로 사진을 찍어 두게 되었다. 남들이 마트나 쇼핑몰에서 어쩌다 하는 일을 나는 우리 집 주차장에서 매번 하고 있는 셈이다. 그나마 주차 문제는 빈약한 뇌의 용량을 이런 기억 보조장치에라도 의탁할 수 있어 다행이지만 그 외의 현실, 특히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언어생활에서는 매번 그런 도움마저 받을 수가 없다.
최근 나이 탓인지, 늘 쓰던 말도 갑자기 혀 끝에서 계속 맴돌기만 할 때가 많다. "있잖아, 그 사람 이름이 뭐였더라?"라고 물어보면 상대방은 뜬금없이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건지 어리둥절해한다. 나는 나대로 아무리 개떡같이 말해도 척! 하면 착! 하고 찰떡같이 알아주지 못하는 상대가 답답하다. 내 마음마저 읽어준다는 지음(知音)이 주위에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인 걸까?
한편 애써 끄집어낸 말이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발화되는 경우도 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나자고 해놓고는 정작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기다린 적도 많다. 가족들과 대화 중에 GS 25 편의점을 LG 24시로 잘 못 얘기하면 아이들은 깔깔 웃으며 "아빠, 벌써 치매야?" 하며 놀린다.
되돌아보니 나도 예전에 어머니가 이상한 말실수를 하면 속 모르게 당신 가슴에 못을 박았던 적이 있다. 그러면 어머니는 "너도 내 나이 돼봐라 " 하셨었는데 이제 나도 그때의 어머니 나이가 되어버렸다. 되어보니 그 마음을 알겠고, 알고 나니 내 마음이 서글프다. 아니 벌써 내가 이렇게 되었나?
사실 말실수는 어쩌다 헷갈렸을 뿐이라고 치부하면 그만이지만 더 큰 문제는 깜빡 실수가 행동으로 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어제 현관 밖으로 자전거를 꺼내다 마침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급한 마음에 후다닥 붙잡아 탔다. 그 바람에 문 밑에 발굽을 걸어둔 채 현관을 활짝 열어둔 상태에서 외출한 지도 모르고...
혹여 모르는 누구라도 들어올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시장에서 돌아온 아내가 몇 시간째 '오픈 하우스"로 방치된 집을 발견하고는 전화로 '도대체 정신을 어디다 팔아먹고 다니냐'며 잔소리를 했다. 하긴, 이렇게 집안을 말아먹을 건망증이면 야단이 아니라 매를 맞아도 싸다.
설마 나만 이런 걸까? 생각해 보니 "이 술 마시면 나랑 사귀는 거다"로 유명한 내 머릿속 지우개란 영화가 떠오른다. 그때는 젊은 사람이 알츠하이머라는 비현실적인 현상쯤으로 넘겨 보았는데 이제는 내 모습이 투사되어 쉬 넘겨 볼 수가 없다. 어제 같은 '웰컴 투 마이 오픈 하우스~' 같은 사고 수준이라면 머릿속 지우개도 그냥 연필 지우개가 아니라 볼펜 지우개급 정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나이가 들다 보면 기억력처럼 사라지는 것도 있지만 반대로 언죽번죽 회복탄력성 같은 것도 생겨나는 것이 인생이다. 내가 어찌해 볼 수 없는 노화현상에 괜한 푸념만 늘어놓기보단 대신 약간의 사고를 전환해 보기로 한다. 까먹은 영어 단어를 몇 번이고 다시 외우던 학생시절처럼, 이제 다시 몇 번이고 반복해야만 비로소 내 것이 되는 시기가 왔을 뿐이다.
나의 기억력이 볼펜까지 지우는 볼펜 지우개라면 오히려 기억을 볼펜 보다 더 강력한 매직펜으로 각인시키면 그만이다. 이제 나의 일상들을 웬만한 지우개로도 지워지지 않도록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쓰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