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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중 Jan 19. 2021

내일 아침 먹고 따지러 가야겠다

야단법석 같은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물색없이 머리속에 떠오른 동요 하나 . 

- 이웃집 순이, 울 엄마 보고 할매라고 불렀다. 잠이 안 온다. 내일 아침 먹고 따지러 가야겠다  


아버지는 며칠 전 건강 검진을 받은 이후에  원인 모를 하혈을 멈추지 않았다. 

급하게 모시고 다시 찾은 병원의 응급실,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내려온 젊은 레지던트 선생님은 바빠서 끼니를 걸러 배가 고픈지 자꾸 말끝을 잘라먹는다. "아~  그러니까 할아버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다그치는 의사의 질문에 아버지는 오늘따라 중언부언, 동문서답만 한다.  


'아니, 환자 같은 호칭 나두고 왜 말끝마다 할아버지래?  우리 아버지가 어딜 봐서 늙어 보인다고...'

안 그래도 병원 측의 의료사고가 아닐까 의심되는 상황인데 아까부터 뒷방 노인네 취급하는 의사의 태도에 부아가 치민다. '안 되겠네. 나중에 담당교수 오면 따져야겠다'   


출혈의 원인을 찾아 이리저리 조리돌림 당하듯 여러가지 검사를 마친 후에야 겨우 입원실을 배정받을 수 있었다. 간호사가 보호자를 찾더니 나에게 입원서류를 잘 읽어보고 보호자란에 서명하라고 한다. 그런데 인적사항 중  아버지의 이름은 낯설지가 않은데 나이는 다시 봐도 아버지 나이가 아닌 것 같다. 삶은 명사로 고정된게 아니라 동사로 구성된것이라는 말처럼, 이름은 불변하는 것이고 나이야 변하는 것이라지만 그 이질감이 너무나 생경해다. '아버지 연세가 벌써 이렇게 되셨나...'    


어린 시절, 뜬금없이 악몽을 꾼 날, 아버지에게 죽지 말라며 울었던 적이 있다. 꿈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아버지는 껄껄 웃으며 “걱정마라, 아빠는 OO살까지 오래 살 수 있을 거야" 라며 안심시켜 주었다. 환갑 잔치를 하던 시절이었고 고희는 말 그대로 희귀한 경우였으므로,  눈물을 닦으면서도 아버지 말대로 과연 OO살이 가능할지는 믿을 수 없었다. 그런데 아득하게만 느껴졌던 그 나이를 아버지는 지금 넘어서 있다.  


하루종일 종합병원의 이름 그대로 종합적 검사에 지치셨는지 아버지는 링거를 맞으며 주무시고 계신다. 주사 바늘이 들어간 저 팔뚝에 동생들과 한참을 매달려도 끄떡없었는데... 그동안 내 나이 먹는 것만 설워했지 아버지 팔뚝 야위어 가는줄은 몰랐다. 아니, 어쩌면 지각을 못한 것이 아니라  '평소 건강하시니까, 아픈데 없으시니까' 보여지는 피상을 위안 삼아, 내 맘 편하자고 현실을 외면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는지...다른 사람들 모두 직시하는 아버지의 현재 나이를 나만 여전히 부인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서류상의 법률상 보호자는 나와 어버지의 위치를 바꾸어 놓았다. 나무 같은 팔뚝에 매달려  보살핌을 받던 나인데 과연 아버지를  보호할 수 있을까? 오늘 말끝을 잘라먹던 그 젋은 의사에게 한마디도 하지 못한 일이 생각나면서 문득 이웃집 순이에게 따지러 간다던 동요속 아이의 뒷이야기가 궁금해진다. "할매를 할매라 하재, 뭐 내가 틀린 말 했나?" 라고 팩트폭격으로 무장한 순이에게 오히려 대거리나 당하지 않았을지...  

 

새삼스럽게도 침대 팻말에 적혀있는 아버지의 나이가 참 많아도 보인다. 내일 의사 선생님들 회진 오시면 따질게 아니라, 울 아부지 잘 좀 봐달라고 절이라도 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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