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어른의 의식(儀式)'을 마주 한 곳은 아버지를 따라 간 작은 이발소. 내 차례가 끝나자 하얀 가운의 이발사는 아버지에게만 변신 마법을 걸어주었다. 아빠 얼굴 위로 눈처럼 쌓인 흰 거품은 산타 할아버지 수염 같기도 했고 달콤한 솜사탕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거품 사이로 마치 동네형들이 뽑기를 뽑듯 한 땀 한 땀 조심스레 면도하는 모습이 왠지 어른에게만 주어진 특권 같았다. 나도 어서 커서 수염이 자랐으면...
그러나 얄궂게도 어른이 채 되기도 전에 털이 먼저 찾아왔다. 중학 시절, 선생님들이 "거기~, 코 밑 시커먼 놈"이라고 불특정 호명을 해도 아이들은 나를 쳐다보았다. 수염이란 2차 성징이 나의 1차적인 상징이 될 것 같아 중2 올라가던 날, 남몰래 도루코 면도기를 샀다. 그러나 처음으로 시도한 면도는 면도라기보다는 다시는 수염이 나지 않도록 박박 밀어버리는 때밀이에 가까웠던 것 같다. 결국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처럼 날카로운 얼굴 상처만 남긴, 생애 첫 면도의 기억이었다.
대학 동아리방에서 며칠씩 밤새던 어느 날, 단체 미팅의 대타로 투입되어 부랴부랴 이동하는데 친구가 편의점에서 산 1회용 면도기로 쓱싹쓱싹 5초 만에 면도를 마쳤다. "인마, 너도 해야겠다"라며 내게도 면도기를 건넸지만 피부의 분자구조가 다른 나의 수염에게는 그런 장난감이 통할리 없어 그만두었다. 그러나 미팅에서 화장 안 한 여자는 순수한 여학생으로 보일 수 있지만 면도 안 한 남자는?...... 그냥 더러울 뿐이다.
성장기의 면도가 마음의 상처를 주었다면 군대에서는 육체의 실체적 고통을 수반한다. '살을 에는 듯하다'라는 표현은 추운 새벽, 차가운 물로 세수한 얼굴에 날이 서지 않은 면도기를 대는 것과 다름 아니다. 배고픈 훈련병 시절, 배식시간에 늦지 않으려면 남들보다 곱절의 면도시간을 어떡해서든 줄여야만 했다. 흔히들 남자들은 군생활을 끝없는 제설작업으로 기억된다고 한다. 자고 일어나면 눈을 치워야 하듯이 그 당시 나에겐 자고 일어나면 돋아난 수염은 면도의 수준을 넘어 제거해야만 하는 제모작업의 대상이었다.
사실 군대에서의 면도는 아침밥 한 끼 덜 먹으면 그만인 선택사항이지만 그러나 밥 빌어먹기 위한 사회생활에서는 면도는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써 그 결이 달랐다. 회사마다 '용모단정" 이란 채용조건부터 그랬고 조직생활에서 깔끔한 얼굴은 성실의 기준, 신뢰의 척도로 작용하는 것도 그랬다. 간혹 덥수룩하게 수염이 자란 채로 출근한다면 상사로부터 "자네 무슨 불만 있나" 라며 인사고과에 알게 모르게 반영될 터였다. 사유는 근무태도 불량쯤 되시겠다.
그런데가 아니라 그래서...
그런 면에서 내게 수염은 불편하고 불필요한 존재다. 매일 반복되는 면도라는 시지포스 형벌로부터 누군가 나를 구해주었으면 좋을 텐데. 그런 고민을 하던 즈음 인도 출장길에 길거리 이발소를 경험하게 되었다. 도로 위의 의자에 누워 뻥 뚫린 하늘을 바라보니 낯선 동양인을 구경하는 현지인들과 온갖 소음들로 둘러싸인 거리의 카오스 속에서 오롯이 사각사각 면도칼 소리만 들렸다. 이 순간 누군가 나를 위해 애써 주고 있다는 사실, 부드러운 손길로 정성 들여 어루만져주고 있다는 느낌. 그 옛날 아버지를 부러워했던 바로 그 로망이었다.
여자에게 있어 화장이 가지는 의미처럼 남자에게 면도란 애증의 관계다. 하지만 가끔씩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면도가 아닌 오롯이 나를 위한 면도. 성실함을 증명하기 위한 생존을 위한 면도가 아닌 위안이 되는 면도가 필요하다. 피천득 시인은 자신이 대형 호텔에서 면도받는 이유를 '그런데'가 아니라 '그래서'라고 했다. 부연하면 '그런데, 왜 그런 사치를 부리느냐'라는 질문에 '술 담배의 용돈을 아껴서, 그래서 사치를 부린다'라는 것이다. 고단한 인생살이에서 항상은 아니더라도 가끔씩의 호사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나 남자들이 미용실에서 이발하는 시대, 어쩌다 길에서 발견한 이발소에서도 이제 면도 도구들은 사라진 지 오래다. "원, 요즘 사람들은 면도를 안 하니 별 수 있나" 라며 이발사 할아버지가 헛헛이 웃는다. 인류가 진화할수록 털은 퇴화 하는데 나 같은 수염러는 회귀 동물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과연 이 수염은 왜 있는 것일까?
수염, 혹은 불필요한 것의 쓸모
그러나 진화의 역사는 직진하더라도 유행은 돌고 도는 법. 최근 들어 잘생긴 몰개성보다 못생긴 개성이 부각되면서 면도가 자신만의 정체성과 멋을 표현하는 희소성 있는 수단이 되는 것 같다. 수염이 더 이상 계륵이 아니라 없으면 아쉽지만 있으면 더 좋은. 마치 자동차 선루프 같은 옵션이 되어버린 같다.
노벨상 수상자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궁둥이란 작품 속에서 주인공은 일과를 마치고 욕실에서 정성스레 자신의 수염을 메 만지고 다듬는 일종의 세정식을 갖는다. 내겐 귀찮은 면도가 누군가에게는 자신만의 의식. 리추얼이 될 수 있다는 설정이 인상적이다. 그러고 보니 어릴 적 무심코 소망했던 수염이 나에게 주어진 선물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위로가 된다. 축복받은 선물은 주위에 자랑해도 좋을 것이다.
요즘 마스크로 얼굴 반이 가려진 일상이다 보니, 그 아래 은밀한 비밀을 가꿔가고 있는 중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그동안 기른 콧수염을 살짝 공개하며 "어떠냐, 괜찮냐? "라고 조심스레 물었다.
하지만 1초의 망설임 없이 돌아오느 대답 "아니, 나까무라 순사 같아"
제길... 내일 당장 밀어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