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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중 Mar 19. 2020

encore _입영열차 안에서

한참 시국이 어수선하던 그 시절, 대학 2학년이 되자 나는 좀 더 현실적인 고민을 하게 되었는데 그 끝에는 군입대 문제가 걸려 있었다. 


마침 그 해 "입영열차 안에서" 란 노래가 유행하여 교문 밖만 나서면 레코드 가게마다 흘러나와 캠퍼스 안에 울려 퍼지던 민중가요와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군대에  가지 않은 학생회 선배들은 나약한 감상에 빠질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금지곡으로 정해버렸지만 모태솔로였던 나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남의 이별노래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된 어느 날,  교류 중이던  일본 가톨릭 학생회가 행사를 위해 한국을 찾아왔다. 우리 집에 머무르게 된 학생들 중 사토코라고 하는 여학생은 나와 동갑내기였다.


언제나 조용히 행동하고 늘 기도하는 모습의 그녀와는 실제로 몇 마디 나누지 못했다.  나는 어쩐지 그녀가 사슴 같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환송회 자리에서  마침 입영 열차 안에서가 나오자 그들은 서울 거리에서 이 노래를 자주 들었다며 어떤 노래인지 내용을 궁금해했다. 


는 취기가 오른 탓에 노래 가사보다는 군사정권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혹독한 군생활을 하고 있다고 조금 과장해서 떠벌였던 것 같다. 


나도  입대하면 군대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객기 어린 말에 듣고 있던 사토코가 갑자기  "당신만은 꼭 무사하기를 바란다"며 눈물을 글썽이는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울음에  당황스러웠지만 한편으론 그녀의 마음이 고마웠다. 그때까지 누군가 나를 위해 울어준 사람은 그녀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알 수 없는 뜨거운 것이 순간 가슴에서 올라오는 것을 느낀 것도 처음이었다. 


다음날 배편으로 귀국하는 그녀를 따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무작정 집을 나왔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아르바이트나 며칠 후에 있는 동아리 합숙 훈련은 중요하지 않았다.  


시한부 같이 짧은 며칠을 바닷가 마을에서 함께 보내고 난 뒤 부두에서 배웅하고 걸어오는데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사토코가 내미는 두 손에는 그녀에게 빌려주었던 치약과 칫솔이 그녀의 손수건에 싸여 있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 들고서 배가 떠난 뒤에도 한참을 제방 위에 서 있었다.    


다시 서울로 돌아오니 아르바이트는 이미 잘려 있었고학교 선배들의 호된 꾸지람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그날 이후로 모든 것들이 왠지 다 귀찮아지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되었던 그 노래가 전보다 내게 더 자주 들려오게 되었다


어쩌다 술을 마시면 선배들 앞에서 나도 모르게 이 노래를 불렀다. 학교도 잘 나가지 않고 집에만 틀여 박혀 있다가 " 너 요즘 왜 그래?"라는 물음에 일일이 답하기도 싫어 그해 2학기가 끝나자마자 도망치듯 입대해 버렸다.    


훈련소의 낯선 환경과 고된 훈련보다도 그녀와 연락할 수 없는 상황이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다 자대 배치 후 집으로부터 그녀의 편지가 동봉된 소포가 전달되었다. 


성모 마리아상이 그려진 편지지에  “너와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기를 매일 기도하고 있어”라고 쓰인  글을 화장실에 숨어 읽고 또 읽었다. 그것은 암울한 군 생활을 버틸 수 있게 해 준 작은 희망이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편지를 주고받으며 1여 년이 지난 어느 날, 보안 검열에서  나의 국제우편 더미가 발견되어 당직사관에게 불려 가게 되었다. 무슨 내용이냐는 물음에 궁색한 설명을 피하려 그냥 위문편지일 뿐이라고 했다.  


“뭐 별거 아니 구만. 됐어 그만 나가봐” 


자칫 큰 사단이 날 줄 알았는데 별일 없어 다행이었다. 내무반으로 돌아오니 고참들이  " 너 그 쪽발이 하고 해 봤냐? " 라며 서로 낄낄대며 놀려댔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냥 위문편지일 뿐이라는 나의 구차한 변명에,  그럼 아무것도 아니라는 당직사관의 건조한 말이 자꾸 귀에 맴돌았다.


과연 우리는 어떤 사이일까? 


 그녀와 내가 서로 마주한 날은 1주일이 채 되지 않는다. 그 이후 몇 달에 겨우 몇 통씩의 편지만을 매개로 어어져 있을 뿐이다. 


녀의 편지 또한  휴전 중인 이웃나라의  군인에 대한 종교적 박애와 위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야말로 군대라는 제약된 환경 속에서 흔한 유행가 가사에 빠져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고 그 속에서 자기 연민을 느끼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사실이 무엇이든 간에 그 사건을 계기로 그동안 외면해왔던 가장 본질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되었다. 외국인인 그녀와 실현 가능한 결론은 무엇인가? 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나는 답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어느 정도 군 생활이 해진 병장 무렵부터는 점점 그녀에게 편지 쓰는 것이 소원해지더니 제대 이후에는 그마저 완전히 끊기게 되었다.    


며칠 전 차를 몰고 집에 오는 길에 심야 라디오에서 입대한 아들에게 보내는 어떤 엄마의 편지가 소개되었다. 


마치 애인에게 보내듯 젊고 세련된 편지 내용이었지만 신청곡은 내가 예전에 들었던,  그러나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  "입영열차 안에서"였다. 


돌이켜보니 까닭 없이 방황했지만 가슴만은 뜨겁던 그 시절,  이 노래는 내게 우연히 찾아온 그녀와 작은 인연을 만들어주었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만약 하늘 위에 걸어놓았던 종이연의 얼레를 되감을 수 있다면 그녀와의 인연의 끈을 다시 감아보고 싶다.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_  피천득 "인연"  

다시 만나는 것이 아니 좋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나이가 되어버렸지만  한편으로는 아니 만나고 살아가는 현명함을 깨치기에는 아직 모자란 나이인가 보다. 


그것을 알면서도 아직 남아있는 온기가 다 식기 전에 그저 한번 얼굴이라도 보았으면 하는 욕심을 내어본다    


만약 그녀를 찾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입영열차 안에서"  노래를  다시 듣게 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분명한 것은  그때는 마저 부를 수 없었던 이 마지막 부분까지도  이제는 가벼운 마음으로  다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날 그대 편질 받는다면 며칠 동안 나는 잠도 못 자겠지

이런 생각만으로 눈물 떨구네 내 손에 꼭 쥔 그대 사진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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