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애초부터 캠퍼스의 낭만 따위는 없었는지도 모른다. 대학만 가면 미팅은 선배들이 다 알아서 해줄 거란 기대는 신입생 환영회 날 비장한 얼굴의 선배가 "척박한 이 조국에서 어찌 한가롭게 연애질이나 하려는가?"라는 질타와 훈계 속에 일찌감치 깨져 버렸다. 특히 우리 풍물패 선배들은 몸소 그 언행일치를 보여주었는데, 이러한 분위기에서는 미팅의 미자도 꺼낼 수 없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게 가두어 둘 수가 없어서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금지된 된 것을 소망하게 되었다. 꽃들이 만개한 5월 어느 날, 결국 동아리 신입생끼리 선배들 몰래 5:5 미팅을 모의하게 되었다. 은밀한 거사.
드디어 D-day, 대학로 음악 다방에서 어설픈 자기소개가 오가고 시덥지 않은 농담들이 끝나자 주선자의 제안으로 학력고사팅으로 파트너를 정하게 되었다. 인생에서 시험이나 미팅이나 눈치싸움은 변함없지만 운 좋게도 나는 상향 지원한 1지망 여학생과 짝이 되었다. 하지만 단둘이 있으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마시지도 못하는 커피만 애꿎게 홀짝이는데 조용히 음악을 듣던 그녀가 이윽고 말을 건넸다
저... 혹시 이 야상곡 좋아하세요?
야상곡? 하지만 야상이라면 복학생들이 즐겨 입던 국방색 야전 상의 밖에 모르겠노라고 말하기에는 왠지 자존심이 상한다. 알량한 자존심은 무모한 만용을 불러오는 법이어서 "어떻게 이 암울한 현실에서 이런 한가한 음악이나 들으세요? " 라고 나도 모르게 선배들의 말투가 튀어나왔다
엉뚱하게 터진 말문은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민족이니 풍물 따위의 어설픈 설교로 이어졌다. 지금 생각하도 설익은 얼치기의 이야기를 그녀는 싫은 내색 없이 끝가지 들어주었고, 헤어질 때는 즐거웠다며 친절한 인사를 해 주었다. 이만하면 첫 미팅 치고는 성공적인걸, 드디어 나도 이제 캠퍼스의 낭만이란 걸 만끽하게 되는구나.
그날 밤, 집에 돌아와 부푼 마음으로 몇번의 편지를 고쳐 쓰며 밤을 새웠다. 혹시 그녀가 나를 고루하거나 답답한 남자로 오해할 수도 있으니 이번에는 좀 멋을 내야겠다. '왠지 멜랑콜리한 이 밤... OO 씨가 말씀하신 녹턴을 들으면서 센티해지는 기분을....' 뭐, 대충 이랬던 것 같다. 다시 쓰면 더 오그라들것 같아 아침 일찍 학보를 보냈다.
그러나 며칠을 과 사무실 우편함 앞에서 기다려 봐도 그녀에게서 답장은 오지 않았다. 삐삐도 핸드폰도 없던 시절, 사전에 집 전화라도 묻지 않은 걸 아쉬워했지만 뒤늦은 후회여서 혹시 내 학보를 못 받았나? 라고 자위할 뿐이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 동아리 술자리에서, 답장이 오지 않는 이유에 대해 미팅 주선자엤던 친구가 간명한 결론을 내려 주었다. 그녀는 나의 1 지망이었지만 그녀에게 나는 2 지망이었다는 사실. 1 지망에 떨어지고 2 지망에 불과한 내가 성에 차지 않았을 그녀로서는 그 야상곡 질문이 어쩌면 내게 던진 마지막 기회이자 테스트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줄 알았더라면 그렇게 낯 뜨거운 편지나 보내 지 말 것을...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친구는 병을 주고니 이제는 약을 준다. ' 잊어버려, 클래식 듣는다면 어차피 너하고는 차원이 다를 거야" 또 다른 친구는 " 잘 됐지 뭐, 그런 여자 사귀려면 돈만 많이 들어가, 지금 보니 인상도 좀 차갑지 않았냐?" 라며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 골라서 위로해 주었다.
'그래, 나 같은 놈에게 여친이니 클래식이 다 뭐람, 역시 친구와 장구가 더 좋은 법이여~' 하고 술을 진탕 마시고는 그 이후로는 미팅 같은 것에는 미련을 두지 않았다.
그랬었는데 세월이 흐르고 흘러, 어찌어찌하다 보니, 좋아하는 음악도 돌고 돌아 요즘은 주로 클래식을 찾아 듣게 된다. 라디오에서는 마침 쇼팽의 야상곡이 흘러나온다. 밤의 상념을 담은 곡. 이렇게 혼자 있는 밤에는 야상곡을 들으며 그 시절로 돌아가 아무에게라도 편지 쓰며 학보도 보내고 싶다.
그 옛날 첫 미팅의 그녀는 지금도 여전히 쇼팽을 좋아하고 있을지,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녹턴을 듣고 있을까? 이제는 이름도 얼굴도 생각이 나지 않지만, 기억 속의 그녀는 어쩌면 내게 이렇게 물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2지망 씨, 혹시 이 야상곡 알기는 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