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중 Apr 18. 2020

비 오는 날의 불가리아 수프

아들과 한강 라이딩을 하다 난데없는 소나기를 맞았다. 비도 피하고 허기도 달랠 겸 공원 편의점으로 뛰어 들어간다. 뭘 먹으면 좋을까? 불현듯 인스턴트용 컵 수프가 눈에 들어온다. 비 오는 날의 수프라... 왠지 낯설지 않은 조합의 기시감이 먼 이국에서의 오래된 기억을 소환해주었다. 


갓 제대한 그 시절, 달랑 깡다구 하나만 배낭에 쑤셔 박고서 난생처음 유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바케트 하나로 며칠을 버티던 배낭여행자에겐 서유럽의 높은 물가와 깍쟁이 같은 인심에 지친 나머지 결국 동구권의 나라들까지 찾아가게 되었다.  


당시 사회주의에 대한 우려와 무지로 불가리아 국경을 넘는 기차에는 동양인은 나 밖에 없었지만 막상 그곳 사람들은 무척 순박하고 상냥했다. 소피아의 어느 미술관이 있는 큰 공원을 구경하는데 누군가 웃으며 다가와 안내해 주고 싶다고 한다. 처음엔 그저 친절한 현지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는 자꾸만 으슥한 곳으로 데러 가더니 막다른 곳에 이르자, 여권과 가진 돈을 다 내놓으라고 웃음기 가신 얼굴로 말했다.  


아~ 이제 끝이구나... 눈앞이 캄캄해지는 순간, 우르릉 쾅하는 천둥 번개와 함께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천우신조. 당황한 그가 한눈을 파는 틈을 타, 이때다 싶어 한바탕 욕을 내뱉고는 냅다 뛰었다. 출구가 어딘지도 모르는 드넓은 공원을 무작정 달리기는 하지만 비 때문에 인적 없는 곳이라 불안은 커져만 간다. 한참을 지나 젊은 일행 두 명이 지나가길래 염치 불고하고 공원 밖까지 같이 걷을 수 없겠냐고 청해 본다. 이들과 함께 라면 그 불한당도 어쩌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니 차츰 안도감이 든다. 


그제야 나를 구원해줄 이 동행들을 찬찬히 살펴보니, 아이쿠~ 이 친구들, 우산도 없이 빗속에서 합창까지 하며 어슬렁 걷는 모습이 너무 유유자적 해주신다. 빨리 공원을 벗어나고 싶은 남의 속도 모르는 듯하여 서둘러 걷자고 재촉하니, 천진난만한 얼굴로 웃으며 토막 영어로 이렇게 말한다. 

 “그러지 말고 너도 이 비를 즐겨봐~, 그렇지 너도 함께 노래 부르는 건 어때?” 

맙소사! 하늘에서 내려온 튼튼한 동아줄이 설마 썩은 동아줄인 것일까? 


그러나 유쾌한 그들의 노래를 들으며 걷다 보니 우중산책의 낭만을 즐기는 사람들이어서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만약 바쁜 사람들이었다면 그 시간에, 그런 곳을, 그렇게 지나갈리는 없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나도 그들을 만날 수 없었을 테니까. 게다가 사람 좋은 그들은 나를 자기네 집으로 데려가 샤워와 식사를 대접해 주었다. 그들이 끓여준 수프는 공원에서의 공포와 소나기의 추위를 금세 잊을 만큼 따듯하고 맛있었다. 


수프의 재료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 속에는 곤경에 빠진 이에게 베푼 배려와 낯선 여행자에 대한 포용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처음 먹어본 불가리아 수프 덕분에 용기 내어 계속 길을 걸을 수 있었고 며칠을 그들과 함께 보내면서 현지 로컬 여행의 참맛을 알게 되었다. 


때마침 편의점 라디오에서 "비 오는 날의 수채화" 란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렇지만 소나기로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의 창 밖 풍경은 노래만큼 여유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혹시 저들 중에서 어떤 여행자가 내게 도움을 청해 온다면 선뜻 우리 집으로 데려가 국 한 그릇 내어 줄 수 있을까? 

글쎄.... 비에 젖은 고양이는 데려 올 수 있어도,  낯선 이를 집으로 들이기에는 솔직히 겁이 앞선다. 아니 사실 좌충우돌 여행하던 그 시절의 나는, 이젠 세상 물정을 알아버린 나이가 되었는지도.      


소나기가 그치자 편의점을 나서며 아들이 묻는다 " 아빠는 비 오는데, 라면 안 먹고 왜 그런 걸 먹어?

나는 그저 웃으며 속으로 말할 뿐. '아들아, 원래 소나기 뒤에는 따듯한 수프가 제격이란다'

 


그리고 어리숙한 나그네에게 여행의 맛과 멋을 알게 해 준 그때의 친구들에게도, '블라고다라야'  



이전 19화 이층집 소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