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동부 해안도로를 따라 공항으로 돌아가는 길, 섭지코지에서 시간이 지체되는 바람에 마음이 급했다. 렌털샵에 들려 스쿠터를 반납한 뒤 김포행 비행기 시간에 맞추려면 조금 서둘러야 한다. 종달리를 거쳐 하도리를 지나칠 즈음, 예전에 잠시 머물렀던 게스트 하우스가 곁눈에 들어온다.
하얀 담벼락과 파란 옥상이 그리스 산토리니를 연상시키는 하o리니 게스트 하우스. 반갑기는 하지만 바쁜 마음 탓에 기억만 남겨두고 스쳐가려는데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옥상으로 뛰어 올라와 나를 향해 짖는다. 달리던 스쿠터를 세우고 게스트 하우스로 다가가니 며칠 묵으며 친해진 그 집 개가 단숨에 외부 계단을 타고 마당으로 내려온다. 펄쩍펄쩍 뛰며 나를 보고 꼬리를 흔드는 것이 꼭 오랜 친구에게 인사하는 것만 같다.
설마, 너 나를 기억하는 거니?
2년 전, 처음 하도리에 여행 왔을 때 하o리니라는 이국적인 이름에 이끌려 짐을 풀었다. 육지에서 혼자 내려와 오픈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젊은 주인은 생각만큼 손님이 없어 걱정이라 했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그 한적함 덕분에 나는 다른 손님 눈치 보지 않고 그 집의 마스코트인 대형견과 오롯이 친해질 수 있었다.
물론 그 개에게도 따로 이름이 있었지만 나는 그냥 파트라슈라고 불렀다. 어쩐지 유럽의 플란다스 와 제주의 하o리니는 서로 물색없긴 하다. 하지만 아무려나, 세상의 큰 개들은 모두 내 눈에는 어릴 적 동화 속 파트라슈처럼 보일 뿐이다.
젊은 주인장은 시내에 장 보러 가면 종종 내게 파트라슈의 산책을 부탁하곤 했다. 나와 산책할 때의 파트라슈는 스쿠터를 따라 천천히 달리는 것을 즐기는 듯했다. 저녁에는 함께 옥상에서 석양에 물드는 제주 바다를 감상했다. 소시지 한두 개에 마음을 허락한 파트라슈는 어느새 술 동무도 되어주었다. "이봐, 그렇게 안주만 먹지 말고 너도 한잔 해야지"라며 물그릇에 맥주를 살짝 따라주었더니 홀짝홀짝 마시기 시작한다. 한 모금 맛보고는 이내 질색팔색 몸을 떨긴 했지만... 그렇게 파트라슈는 홀로 찾은 제주에서 나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렇지만 벌써 2년 전의 일이다. 더군다나 나도 지금에서야 떠오른 기억을 어떻게 개가 생각해내어 지나가던 사람을 불러 세웠는지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인간은 상대방의 믿음을 눈으로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법이라서 이것이 우연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지날 때도 같은 행동을 보이는지 멀찍이 숨어서 지켜보았다. 하지만 파트라슈는 조금 전 내게 보인 반응을 다른 이에게는 보여주지 않았다.
이번에는 스쿠터를 타고 떠나는 시늉을 했더니 다시 옥상으로 올라가서 내게 가지 말라며 컹컹 짖는다. 못 이기는 척 슬며시 되돌아가면 다시 쪼르르 내려와 나를 반긴다.
그렇게 몇 번의 숨바꼭질을 반복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이 녀석은 분명히 나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가 스쿠터 소리 때문인지, 소시지 냄새의 소환인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단순한 우연을 마음 가는 대로 확증 편향한 것일 수도 있다. 하긴, 사람도 아닌 개가 잠시 머물렀던 나그네를 알아본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 일지도... 그러나 사람이 아닌 동물이기에 오히려 그것이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무엇이 진실인지는 이제 내게 중요하지 않다. 잠시 스쳤던 사이였음에도 나란 존재를 아무런 사심 없이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큰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과연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작은 인연을 이렇게 기억해 본 적이 있었던가
길에서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여행자에게는 일상이자 숙명이다. 무채색의 그림 같았던 여행길을 제주 바다처럼 반짝이는 추억으로 채색해준 파트라슈. 하지만 나는 옥상에서 계속 나만 바라보던 파트라슈에게 "곧 다시 올게"라는 짧은 인사를 남긴 채 총총히 하도리를 떠나왔을 뿐이다.
또 다른 2년의 시간이 지났다. 하o리니의 젊은 주인은 이 코로나 시국을 잘 버티고 있는지, 언제쯤 제주에 맘 편하게 갈 수 있을지, 무엇보다도 그 개와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까지 안녕, 파트라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