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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중 Sep 05. 2021

이층집 소녀

습작 소설

1. 봄학기


4년 만에 돌아온 학교는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막걸리를 마시던 잔디밭은 이름 모를 나무들로 채워져 버렸고 캠퍼스 곳곳에는 취업설명회 플래카드로 뒤덮여 있었다. "그 둘, 이번에 같이 졸업했다더라" 도서관 자판기 커피를 건네며 K는 조심스레 말했다. 못 들은 척하고 취업준비는 어떻게 돼가는지 물었다. "안 하던 공부 하려니 죽을 맛이다. 이제 연애 같은 건 사치야, 취직만이 가치 있는 일이지"라고 말하고는 그는 서둘러 전공 수업에 들어갔다.


도서관 뒷건물의 어학원은 이미 등록기간이 지난 탓인지 접수처는 한가해 보였다. K가 추천해 준 토익 강의를 찾아보았지만 남아 있는 것은 기초회화 같은 몇 강좌뿐이었다. '이렇게 또 한발 늦어버렸군' 씁쓸히 웃으며 저녁 타임에 비어있는 강좌 하나를 신청서에 적어 냈다. 따분한 얼굴의 강사가 진행하는 원어민 회화 수업은 수강생이 몇 명 되지 않아서 앞뒤 사람들끼리 짝을 이뤄 자기소개나 주말에 했던 일 등을 서로 이야기하는 식이었다. 창가 구석 내 앞자리에는 가끔 여학생 두 명이 함께 앉곤 했는데 내 학번을 듣더니 "와~ 한참 선배네요. 아직 닉네임 안정하셨으면 엉클이라고 불러도 되죠?"며 자기들끼리 한국말로 웃었다.


아무려나... 그다지 놀리려는 것 같지도 않고 또 영어 이름 같은 걸 따로 정하는 일도 귀찮아서 그냥 웃어보였다. 회화 교실은 썩 도움이 되는 것도, 그렇다고 지루한 편도 아니었지만 저녁에 달리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학생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고는 자연스럽게 들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자취방으로 향하는데 누군가 가방을 톡톡 치며 아는 체를 한다.


"어머, 아저씨도 후문 쪽에 살아요?" 누굴까 했는데 처음 엉클이란 닉네임을 붙여준 여학생 중 한 명이다. "오늘은 동아리 모임 때문에 수업 못 갔는데 뭐 특별한 거 없었죠? " 술 때문인지 약간 상기된 목소리로 "하하, 이웃사촌이었네, 전요 저기 살아요." 손을 들어 가리킨 곳은 늘 지나가던 길가의 담장 위로 커다란 창문이 보이는 한 이층 주택이었다. 그녀는 오늘 수업에 대한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서 "그럼 아저씨 내일 봐요" 인사를 남기고는 총총히 대문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맹랑한 아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길을 걷다 뒤돌아보니 어느새 이층 집 창문에 환하게 불이 들어와 있었다.


다음날 저녁, 수업이 끝나자 자연스럽게 귀갓길을 동행하게 되었다. 영문과 2학년이 되었지만 자기는 영어를 잘하는 편도, 좋아하는 편도 아니라며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는 "참, 닉네임은 조금 미안했어요. 찾아보니 아저씨가 영어로 엉클은 아니더라고요"며 다시 헤헤 웃었다. 여러 날을 함께 길을 걷다 보니 웃음이 많은 그녀의 고향은 바다가 보이는 강릉이라는 것, 1학년 때 같은 과 동기와 CC였지만 지난겨울 입대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가끔 남자 친구 이야기를 할 때는 얼굴이 어두워 보일 때가 있었다. "남자들 제대하면 군화 거꾸로 신는다는데 아저씨도 그랬어요?"라는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해 줄 수가 없었다.


2. 여름방학


1학기가 끝나갈 무렵, 그녀는 방학이 시작되면 고향집에 돌아갈 계획이라고 했다. 수업 마지막 날 "그런데 아저씨는 여전히 말이 없네요" 지나가는 말에 무슨 뜻인지 몰라 당황하자 그녀는 이내 "그게 아니라 회화를 잘하려면 말을 많이 해야 하는데 아저씬 너무 과묵하잖아요" 라며 쿡 웃었다. 그 웃음에 용기를 내어 오랫동안 준비한 말을 꺼냈다. "다음 주, 제 생일인데 고향 가기 전에 영화 한 편 봐요, 우리"


주말 아침, 약속한 극장 앞에 평소와는 달리 립스틱을 바른 그녀가 서 있었다. "싫다는데도 하숙집 친구가 빈혈 있어 보인다고 억지로 발라준 거예요"라고 말하는 붉은 입술 따라 그녀의 볼도 발그레해졌다. 어느 체코 감독이 만들었다는 영화는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지만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먼저 꺼낸 그녀의 마음은 알 것 같기도 했다. 영화가 끝나고 식사를 하며 그녀가 건네 준 카드에는 '오빠 생일 축하해요'라고 적혀 있었다. 그 말이 낯설었지만 꼭 어색하지만은 않았다. 그녀 집으로 향하는 익숙한 길도 오늘만큼은 다르게 느껴졌다.


방학 동안 자취방과 학교를 오가는 단순한 생활이 반복되었지만 도서관 마감시간이 되면 주섬주섬 책을 정리하고 그녀의 하숙집 근처 구멍가게에 들러 맥주 한 캔을 사곤 했다. 주인 없는 이층 방 창문은 불 꺼진 채 그대로였지만 대신 한 여름의 보름달이 밝게 비춰 주었다.


3. 가을 학기


2학기가 시작되어도 그녀는 어학원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가을 해가 짧아지고 어둠이 일찍 내려앉게 되면서 하숙촌 골목길에서 그녀의 이층 집 불빛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수업이 끝나고 돌아가는 저녁길에 창문에 불이 켜져 있으면 반가웠지만 어쩌다 꺼져있기라도 한 날에는 가슴 한편에서 알 수 없는 마음이 일었다. 그것은 단순히 그녀의 부재에 대한 걱정이라기보다는 좀 더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었다.


제자리걸음만 하는 회화 수업도 차츰 답답해져갔다. 복학하면서 품었던 연애는 사치고 공부만이 가치라는 말이 지금도 유효한 건지 자꾸 의문이 들었다. 꾸역꾸역 도서관에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머리 한구석에는 어떤 형태의 질문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어쩌면 간단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아저씨로 남느냐, 아니면 오빠가 되느냐 두 선택지에서 하나만 고르면 되는데 그녀와 나를 둘러싼 모든 상황을 대입하면 너무 어려운 방정식으로 느껴졌다.


"뭐야, 무슨 복수극이라도 찍는 거야" K는 농담처럼 말했다. 하지만 이내 정색하며 "그런데 말이야, 적어도 너는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라며 차가운 술잔을 내게 돌려주었다. 왜 나만 안되는데... 그날 밤 술에 취해 이리저리 걷다 보니 공중전화 부스 안이었다. 건너편 가로등 불빛을 향해 달려드는 날벌레를 한참 바라보다 결국 다이얼을 돌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라고 시작했지만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오랜 정적 뒤에 그녀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 조용히 건너왔다. "저... 남자친구 있잖아요" 전화를 내려놓고 부스를 나오니, 가로등 밑에는 아까 보았던 불나방들이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었다. 그것을 밞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숙취가 해소된 탓인지 앞으로는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으로 하루 종일 영어 테이프를 들었다. 하지만 몇 번을 들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처럼, 그녀의 마지막 말은 머릿속에서 재생할수록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저 남자 친구 있잖아요'라는 그 짧은 문장은 내게는 어떤 날은 완고한 부정문으로, 또 어떤 날은 여지를 남기는 긍정문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Can과 Can't의 사이에서 어지럽기만 한 마음은 무심코 그 집 앞을 지나치게 되면 한층 더 소란스러워졌다. 보지 않으려 해도 쉽게 내 마음에 들어왔다. 그렇게 마주치는 것이 싫어 남은 학기 내내 방에서 나올 수가 없었다.


4. 겨울 방학


겨울이 끝나갈 무렵, K가 배낭을 메고 자취방에 들이닥쳤다. "일어나 인마, 언제까지 이럴 거야"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는 내게도 배낭 하나를 던져주었다. 출근 전에 취업 기념으로 함께 설악산을 종주하고 싶다고 했다. 내키지 않은 산행이었지만 켜켜이 쌓인 생각들을 한 발씩 내딛는 눈 속에 차곡차곡 밞으며 2박 3일을 걸었다. 이른 새벽 산장 밑에 있는 차가운 계곡물에 겨울 동안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도 밀어버린다. 이렇게 걷다 보면 흐르는 땀과 함께 이제 몸도 마음도 가벼워질 것이다.


그러나 대청봉 정상에서 마음속에 쌓아 올린 탑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일출을 바라보다 강릉 시내가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손에 닿을 듯 바로 저기에 그녀가 있다고 생각하니 그만 턱 하고 무릎이 꺾이고 말았다.


<다시 봄>


"그때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너흰 모를 거다" 졸업 20주년 동창회가 끝나고 여남은 몇 명이 오랜만에 모교 앞 고깃집으로 옮겨 2차를 이어가다 불콰해진 K가 너스레를 떤다. 부동산이니 건강검진 따위의 화제가 바닥나자 대학시절의 추억거리가 안주로 올라온 참이다. "대청봉에서 막무가내로 강릉 가겠다는데, 이 녀석이 쳐다본 데가 속초였지 뭐야"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테이블 중 누군가 "아무리 산 꼭대기라도 속초하고 강릉은 엄연히 가시거리가 다른데" 쯧쯧 혀를 찬다.


아직 대상과 허상을 구별하지 못하던 그때의 얼치기 복학생 아저씨는 이제 진짜 아저씨가 되어버렸다. 술자리가 끝나고 집으로 향하는 택시 너머 그 옛날 이층집이 스치듯 지나간다. 시간은 내게서만 흘러갔을 뿐, 여전히 누군가 살고 있는지 불 켜진 창가 주위에 뻗어있는 담쟁이넝쿨은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다. 어지러운 넝쿨처럼 스스로 그어 놓은 경계와 경계 사이를 하릴없이 배회하던 그 시절, 저녁노을이 비치던 이층집 창문에 내가 투영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달리는 차창 뒤로 이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이 멀어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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