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랜 시간이 지났건만 지금도 자다가 이불킥을 하게 된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펴랬는데 거길 왜 갔을까?
내 발음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코로나 이후 비대면 수업이 일상화되면서 대면 수업에서는 미처 깨닫지 못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중 하나는 자기가 자기를 보는 자괴감. 동영상 화면 속에서 마주하는 낯익지만 낯설기만 한 내 모습에서 생경하다 못해 이질감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진짜 피할 수 없는 것은 전달력 문제. 종종 학생들로부터 피드백을 받아보면 ‘강의 중간에 뭐라고 말했는지 잘 안 들린다 '라는 예전엔 없었던 내용이 눈에 띈다. 간혹 학점에 민감한 아이에게서 "지난주 동영상 o분 o초에서 언급하신 단어가 정확히 뭔가요?’라는 질문 아닌 질문을 받게 되면 마치 강의가 아닌 듣기 평가가 되어버린 것 같아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과연 녹화 영상을 돌려볼수록 발음도 발음이지만 억양이나 어조 그리고 '음~', '어~' 하는 미처 몰랐던 어벽까지 귀에 거슬린다. 모르면 모르되, 알고 나니 그동안 클린하지 않은 수업을 들었을 학생들을 위해서라도 전달력을 개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피치 학원이라도 등록해야 하는 게 아닐까 고심하던 차에 구청 평생교육센터 홈페이지에서 '아나운서와 함께 하는 말하기 교실 안내' 배너를 발견했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이 많은가 보다. 토요일 2시간 특강이라니 시간도 안성맞춤이어서 속성 레슨이라도 받을 요량으로 바로 신청을 헸다. 지금까지 내가 낸 세금이 어디에 쓰이는지 몰랐는데 이렇게 찾으니 지자체로부터 직접 수혜를 받을 수 있다니. 호~ 이제 우리나라도 복지국가 인정
설마 아저씨가 아나운서 지망생?
주말 아침, 구청 평생교육원 강의실에 일찌감치 도착해서 빈 자리를 잡으니 한 명, 두 명 수강생이 들어오는데 연령대가 점점 낮아진다. 마지막에는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듯한 아이가 엄마 손에 이끌려 들여보내졌다.
이렇게 모인 6명이 나만 빼고 모두 초등학교 여자 아이들이다. 뭔가 이상한데... 휴대폰으로 구청 홈페이지를 다시 확인해봐도 ' 신청대상 : 말하기에 관심 있는 지역주민 모두'라고 분명히 되어있다. 결국 문제는 신청자자체가 아니라 신청자의 동기인 것이다.
'아나운서와 함께하는 말하기 교실'를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아나운서 직업 체험으로 읽었는데 나만 아전인수격으로 성인 대상 스피치 교실로 확증 편향하는 오류를 저지른 것이다. 초등학생들 체험 학습에 어른이, 그것도 남자가 툭 끼어있으니 힐끔힐끔 쳐다보는 눈길마저 '설마 아저씨가 아나운서 되려는건 아니죠? " 하고 묻는 것 같아 가시방석이 따로 없다.
1교시 : 자기소개와 이론수업
여긴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니 그냥 집에 갈까 고민하는데 강사가 들어오는 바람에 그만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구청 아나운서라는 강사님은 교실 한구석의 나를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서 출석부와 번갈아 대조하더니 이내 아이들을 보며 바로 수업을 시작했다."여러분~ 반가워요, 우리 수업 시작 전에 한 명씩 자기소개부터 해볼까요”
왜 한국 사람들은 어른이나 아이나 어떤 모임에서건 항상 자기소개를 해야 하는지 원망스러웠지만 배움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 이왕 시작했으니 빨리 이 분위기에 적응하는 것이 좋겠다.
제일 큰 아이가 앞에 나와 'ㅇㅇ 초등학교 ㅇ학년 ㅇ반 누구'라고 자기소개를 하자 나머지 아이들도 쪼르르 따라 한다. 나도 나로 인한 교실의 어색함을 익숙함으로 전환하기 위해 “안녕하세요, 저는 4학년 9반 OOO입니다. 모두 반가워요"라고 활짝 웃으며 인사를 했다.
이제 자연스러운 동질감이 형성될 거라고 기대했던 나의 승부수는 결국 무리수가 되어 돌아왔다. 한 꼬마 아이가 "헐~ 자기가 4학년이래... 언니, 저 아저씨 이상하지 않아?"라고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 만 것이다.
이들에게는 내가 나이까지 속여가며 아나운서를 체험하려는 수상한 사람으로 보였나 보다. 순간 얼굴이 화끈거리고 머릿속은 이걸 어떻게 설명해줘야 할지 복잡하다. 어서 쉬는 시간이 되어 바로잡아주고 싶은 마음뿐이다. 얘들아, 어른들은 49살을 4학년 9반이라고 달리 말하기도 한단다. 나 이상한 사람 아니야~
토요일 오후 그냥 집에서 낮잠이나 잘걸, 이 나이에 뭘 배우겠다고 이런 오해까지 받으며 초등학생들과 '중앙청 쇠창살', '안 깐 콩깍지 깐 콩까지'를 참새처럼 목청 높여 따라 하니 또 다른 자괴감이 든다.
개중에는 한글을 다 깨치지 못한 1학년 꼬맹이들이 강사에게 “선생님~ 중앙청이 뭐예요?”, "이건 무슨 글자예요?"라고 질문을 한다. 음... 평소에 아내가 나보고 나이 먹을수록 유치원생이 되어간다고 타박을 놓았는데 이렇게 1학년 누나들과 같은 교실에서 나란히 한글 수업받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2교시 : 가상 스튜디오, 앵커, MC 실기수업
1교시는 책상에 앉아 수업을 받아 그나마 괜찮았지만 2교시는 가상 스튜디오로 이동해서 직접 실습해보는 실기 수업이다. 스튜디오 창문을 통해 학부모들이 자기 아이들 사진을 찍다가 생뚱맞게 서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웃지나 않을지 자꾸 위축되어 간다.
모니터에 띄워진 스크립트를 보고 카메라 앞에서 뉴스 앵커 역할을 연습하는데, 열정 넘치는 강사님은 내 속도 모르고 "이번 건 너무 딱딱하네요. 긴장 푸시고 다시 한번 가볼게요"라고 계속 푸시한다. 이토록 친절하신 분께 '죄송하지만 저는 이런 거 말고 스피치 배우러 왔는데요'라고 차마 말할 수가 없다.
끙 ~ 지금까지 버텼으니 조금만 더 참았다가 수업만 끝나면 평소 말 습관을 원 포인트로 교정받고 얼른 자리를 뜨자고 스스로를 다독일 뿐.
그러나 점입가경, 설상가상 다음은 서로 짝을 지어 진행하는 아침방송 MC 실습 시간. 아이들이 저희들끼리 파트너를 정하고 나니 짝 없는 나는 6학년짜리가 마지못해 내 상대역을 맡게 되었다.
그 친구가 먼저 "요즘 날씨가 많이 덥죠오~, 오늘은 어떤 소식을 전해 주실 건가요오~"라고 멘트를 하면 내가 바로 받아 '네, 여름탈출! 지금 바로 그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시죠'라고 하면 되는데 그 두 줄짜리 멘트가 왜 그렇게 어려운지...
어색한 손짓 액션까지 신경 쓰느라 자꾸 NG가 나고, 뜨거운 조명 탓에 땀도 삐질삐질... 나야말로 이 현장을 탈출해서 쥐구멍 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이런 나를 쳐다보는 초등학교 최고참 6학년 여학생의 복잡한 표정에서 많은 것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 눈빛에는 분명 이런 말이 들어있었다. '아저씨, 낄끼빠빠라고 아시죠?'
그날의 원 포인트 레슨 하나, 그놈의 원 포인트 레슨 좋아하다가는 망신당한다는 것.무엇을 배우려면 지름길 같은 단기 속성말고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진짜 교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