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부터 주말만 기다렸는데 계속 비가 오더니만 모처럼 화창한 일요일이다. 오늘이야말로 준비해 온 큰 그림을 그릴 절호의 기회다. 우선 해가 중천인데도 여전히 자고 있는 아들을 깨우기로 한다. "OO야, 아빠랑 초계 국수 먹으러 안 갈래?" 아무리 흔들어도 꿈적 안 하던 녀석이 잠결에 낯선 음식 이름이 들리자 눈을 비비며 물었다.
"무슨 국수?"
"응, 초계 국수라고 자전거 라이더들이 많이 가는 맛집이 있대"
아들은 자전거를 타고 가야 한단 말에 조금 실망한 듯 보였지만 초계 국수라는 것이 과연 어떤 맛일까 궁금해서인지 주섬주섬 옷을 입는다. 이럴 때 아들과 함께 입을 자전거 유니폼이 있다면 더 좋을 텐데... 나란히 싸이클복을 맞춰 입고 자전거 도로를 질주하는 다른 아빠와 아들이 어찌나 부럽던지. 촌스럽기만 한 바퀴벌레 커플룩보다 내겐 더 질투나는 것이 부자간 자전거 커플룩이다.
뭐, 아쉬운 대로 추리닝이라도 대충 깔맞춤하고 베란다에서 먼지 쌓인 MTB 2대를 꺼내어 떠날 채비를 마쳤다. 집에서 자전거 도로를 따라 달리면 팔당대교 초계 국숫집까지는 왕복 2시간 거리지만 이직 라이딩이 서툰 중3 아들에게는 어떨지 잘 모르겠다. 아니나 다를까, 평지에서는 그럭저럭 잘 따라오던 아이가 악명 높은 암사동 깔딱 고개를 만나자 맥을 못 추고 자전거에서 내려왔다.
자기보다 더 무거운 고철 자전거를 삐질삐질 끌고 올라가던 아들이 마침 옆에서 힘들이지 않고 쌩~ 언덕을 넘어가는 전기자전거 라이더들을 부러운 듯 바라본다.
"OO이도 저거 하나면 문제없겠다. 한번 엄마한테 전기자전거 사달라고 졸라봐"
"됐어요, 집에 2대나 있는데 또 무슨 자전거냐고 타박만 맞을게 뻔해요"
초계국수를 먹으며 다시 아들에게 주말마다 이렇게 맛난 걸 먹으려면 우리 집에도 전기자전거가 필요하지 않겠냐고 설득해보았지만 녀석은 라이딩 자체에 질려버렸는지 이후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저녁나절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둘이 웬일이래, 생전 안 타던 자전거를 타고~"라며 처음에는 반색을 했지만 기진맥진한 아들의 모습을 보고는 얼마나 힘들었는지 물어보아도 아들래미는 그냥 제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자식, 무뚝뚝하긴... 엄마에게 오늘 일 자세히 말해주면 좀 좋아' 나만 아쉬울 따름이다.
하는 수 없이 저녁식사 후 틈을 보아 아내 옆에 조용히 앉으며 말을 건넸다. 물론 깊은 한숨과 함께
"오늘 OO이 자전거 타는 거 보니까 체력이 많이 부족한 것 같더라구"
" 그러게, 어떡하지? 보약이라도 한 첩 해서 먹여야 하나"
옳지~ 슬슬 입질이 시작되었군.
"아니야, 사내 녀석이 그럴수록 더 운동으로 단련해야지, 한 시간씩 자전거 타면 보약보다 더 좋다던데"
이쯤에서 잠깐 아내의 표정을 살펴야 한다. 역시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이다. 이제는 미끼를 투척할 차례.
"그런데 OO이 자전거가 너무 고물이라 타기에 무리인가봐. 아~ 맞다! 아까 그 녀석 전기자전거에 관심 있는 것 같던데 비싼 보약 대신 차라리 전기자전거 하나 사주는 게 어떨까?"
그러자 아내는 "음~ 전기자전거란 말이지" 혼잣말로 뇌까리며 거실 PC 앞에 앉아 열심히 마우스를 움직인다.
아니 설마 지금 당장 사려는 건가? 오~ 이 정도면 예상보다 훨씬 진도가 빠른데...
뭐야, 이 여자 생각보다 너무 싱거운걸. 후훗
그러나 5분 뒤, 아내는 날카로운 수사관의 시선을 던지며 나를 심문하기 시작했다.
"당신, OO이 때문에 오늘 처음 전기자전거 생각해낸 거야?"
뭐지? 갑자기 훅~하고 들어오는 이 느낌은? 안돼, 정신차리고 신중하게 대답하자.이 한 고비만 넘기면 전기자전거가 들어온다.
"그럼~ 나도 오늘 깔딱 고개에서 처음 봤다니까. 전에는 전기 자전거란 게 있는지도 몰랐어"
"그래? 그럼 이건 뭐야?"'
아내가 나를 향해 돌린 모니터에는 기대했던 쇼핑몰 화면이 아니라 인터넷 사이트 방문 기록이 쭉~ 나열되어 있었다. 모두 낯익은 제목들이다.
급질, 전기 자전거 잘알못입니다 구매 팁 좀 알려주세요. 내공 겁니다
초보자도 찾기 쉬운 내게 맞는 전기자전거 고르는 방법
전기 자전거 다나와 최저가 가격 비교 사이트
아뿔싸, 검색기록 삭제하는 걸 깜박헀다
"어쩐지 요즘 이상하게 뜬금없는 자전거 광고가 자꾸 뜨더라니... 한 달 전부터 이렇게 눈독을 들여놓고선, 뭐 오늘 처음 봐? 아들 핑계 대고 자기가 타려는 속셈 모를 줄 알아, 여보세요 아저씨! 차라리 귀신을 속이세요"
에이쒸, 망할 놈의 맞춤 광고, 얼어 죽을 알고리즘
" 아니, 여보~ 그게 아니고...."
뭔가 변명이라도 해야겠지만 귀신같은 이 여자 앞에서 어떻게 둘러대야 할지 나쁜 머리만 열심히 굴리는 순간 데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서 지지~ 지지직하고 무전 소리가 들린다
아~아, 여기는 지휘본부다. 작전 실패! 이번 작전은 망했으니 더 이상 허튼짓 말고 그 입 다물라,
뭐 큰 그림? 빅 픽쳐는 개뿔...
에휴, A부터 Z까지 완벽한 계획이었는데 아쉽게도 이 장기 프로젝트는 여기서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
다만, 차기 플랜을 위한 한 가지 교훈만 남긴 채...
쇼핑 검색은 반드시 휴대폰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