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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중 May 30. 2021

훔친 딸기우유가 맛있다

누가 내 딸기우유 먹었어 

딸이 좋아하는 치킨을 사들고 퇴근을 하니 마침 아이도 일찍 집에 와 있다. 재수하느라 새벽에 등원하고 밤늦게 돌아오는게 안쓰러워 반갑게 인사를 하는데 웬일인지 눈빛이 차갑기만 하다. 


"냉장고에  있던  딸기 우유, 혹시 아빠가 먹었어?" 

우유?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 뭐 하나 꺼내 먹은 것 같기는 하다. 

"아~ 그거, 유통기한 얼마 안 남은 거 같아서 아빠가 먹었는데"

"아이~나중에 먹으려고 아껴둔 건데, 허락도 없이 먹으면 어떡해"

"난 그냥 냉장고에 있길래....아빤, 네 건지 몰랐지"

"그냥 있는 게 어딨어, 누군가 주인이 있을 거라고 왜 생각을 못 해?" 


 변명 할수록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 같아 일단 사과를 하는 편이 낫겠다.   

 "미안, 대신 내일 두 배로 갚을게, OK? “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던진 농담이었는데 딸아이가 폭발하고 말았다. 

"됐어, 누가 사달래?  한두 번도 아니고 아빠는 항상 이런 식이야"

하고는 문을 쾅! 닫고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에게 아는 척을 했다가 면박당한 것보다 더 무안하고 당황스럽다. 싸늘해진 식탁에 앉아 덩그러니 치킨을 보니 처음에 가졌던 미안한 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서운함으로 바뀌어간다. 아니, 고작 우유 하나 때문에 이렇게 울고 불고 할 일이란 말인가? 


딸의 입장에서는 내 행동을 무개념 하다고 비난하겠지만 나는 나대로 이 상황을 이해하기 어렵다. 나 때는 형제끼리 밥상 위에서 티격태격은 했어도 먹는 것으로 아버지와 얼굴 붉힌 적은 없었다. 식구(食口)라는 문자 그대로 가족끼리는 나눠먹는 것이고 특히, 냉장고 음식은 공유된 것이라 여겼었다. 결혼 후에도 아이들 키우면서 덜어 먹고 보태 먹으며 네 것, 내 것 구분하지 않던 습관이 남아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 다 컸다고 아빠를 제 것이나 훔쳐먹는 몰염치한으로 원망하는 자식이 못내 서운하기만 하다. 


'나는 무엇을 사더라도 저 먼저 챙기는데'로 시작된 섭섭함은 '포스트잇으로 미리 표시라도 해두던가' 같은 부주의의 책임소재와  '제것도 따지고 보면 내가 준 용돈으로 산건데'라는 유치한 소유권 논쟁까지...  여러 가지 사념들은 가슴 한편에서 소란스럽게 이어졌다. 그렇게 한번 틀어진 못난 마음은 한 없이 똬리를 틀더니만 인사이드 아웃처럼 내 안에 존재하고 있는 한 캐릭터를 소환하고 말았다.'흥~ 나도 삐쳤다!'    

 

그렇게 딸아이는 화난 채로, 나는 삐친 채로, 부녀가 한 집에서 소 닭 쳐다보듯 서로 대화 없이 맨숭맨숭 한 달을 넘기니 참다못한 와이프가 한마디 한다. 

"아빠란 사람이 그렇게도 자기 딸을 모르나? 쟤한테 먹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잊었어?"   


그제야 잊고 지내던 아니, 한동안 잠잠해서 잊은 줄 알았던 기억의 편린이 떠 오른다. 딸은 어려서 아토피 때문에 음식 섭취에 많은 제한을 받았다. 유치원 친구들이 생일 케이크며 피자 따위를 먹을 때 저 혼자만 다른 식탁에서 맛없는 음식을 먹어야만 했다. 이웃 사람에게 선물로 사탕이라도 받을라 치면  엄마에게 "안돼, 넌 먹으면 가렵잖아, 대신 동생 주렴"하고 양보를 강요받았다. 


한참 소유 개념이 형성되는 시기에 딸은 음식에 대해서는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은 많이 나았다 해도, 어린 시절 억제된 본능에 대한 보상 욕구가 투사되어 먹는 것만큼은 오롯이 본인 뜻대로 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기에 내게 딸기우유는 유통기한 전 먹어여할 소비재였지만 정작 딸에게는 자기 존중을 대변받는 가치재로 인식되었던 것이었나보다.  


그런 딸기우유를, 학원에서 밤늦게 돌아와서 맞이하는 유일한 기쁨의 대상을 홀랑 빼앗아 버렸으니 아빠란 사람의 무신경과 옹졸함이 부끄럽기만 하다. 지금이라도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은데 어색해진 관계를 복원해줄 말을 어떻게 건네야 할지 몰라 궁리만 하던  5월의 어느 날, 띵똥!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아빠, 어버이날 축하해요. 저번엔 미안했어요. 그리고 이제 건강 생각해서 몸에 나쁜 건 드시지 마세요" 


큰 수술을 받고도 여전히 군것질 습관을 버리지 못한 철부지 아빠를 걱정해 주는 딸의 마음과 먼저 내밀어준 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볼 수밖에 없었다.  아~ 나는 어른이 되려면 한참 멀었구나..


습관이란 게 무서운 것이어서 아직도 무의식적으로 냉장고 문을 여닫곤 한다. 하지만 지금은 먼저 음료수 개수부터 세어본다. 4개 이상이면 아내가 사 다 놓은 가정용이지만, 낱개라면 딸이 사 다놓은 개인용일 확률이 높으니 조심해야 한다. 


그렇게 주의한다고 했는데 오늘 부엌에서 " 어~ 왜  이게 하나가 없지? " 하는 새된 소리가 들려온다. 이크!  어제 못 보던 종류의 요거트가 여러 개 있어서 안심하고 먹었는데 아니었나 보군. 어쩐다?  자수를 해야 하나 시치미를 떼야하나? 


아무 옷이나 걸쳐 입고는 슬며시 집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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