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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중 May 10. 2021

현찰 봉투

내돈내산말고내돈내준

"나도 이제부터 월급을 받아야겠어"

퇴근해서 식탁에 앉아 숟가락뜨는 내게 아내가 작심한 듯 선언을 한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최근 들어 '자신은 월급도 없이 집안일만 하는 존재'라며 부쩍 신세 한탄을 할 때부터 그런  조짐이 보였다. 사실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아내에게 주부로서의 노동에 대한 보상을 제대로 한 적이 없긴 하다.

대신 아내 몫의 카드 대금이 매달 급여통장에서 빠져나가고 있으므로 실질적인 급여나 마찬가지리고 그동안 궁색하게 방어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의 전환과 약간의 양보가 노사 모두에게 윈윈을 가져다 준다지 않는가". "당신으로서도 가사 노동이  열정페이였다고 생각하 스스로 자기 박탈감만 커질 뿐이니 무임금이라고 생각 말고 카드대금로 대체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덜 서운하지 않겠냐" 고 살살 달래며 말로 때우려 했다. 그러나 아내는 단호했다.


" 아니~ 쓸데없는 소리 말고 앞으로 매달 00만 원씩 줘"


오늘은 단단히 마음을 먹었는지 이쯤 되면 식탁 테이블협상 테이블이 되어버렸다.   

정신 바짝 차리고 일단 수정안을 제시해보았다.


- 사측 :  월  00만 원은 무리다. 월  XX만원으로 하자
- 노측 :  콜!  대신 전액 현금으로 봉투에 담아 달라

역시 단순한 사람이라 아내와의 임금협상생각보다 쉽게 타결되어 다행이다.


그런데 그건 그렇다 치고 월급봉투 사라진지가 옛날 사람처럼 웬 현봉투 타령인가?

요즘 월급 바로 급여통장에 입금되다보니  나 역시 월급봉투 구경해 본지도 득하. 게다가 모바일 이체와 카드 사용으로 굳이 현찰 만져볼 필요성도 사라진지  오래.

 

"허참~ 이 여자가 요즘 버스도 현금 안 받는 거 모르나? 괜히 번거롭게 하지 말고 지금처럼 카드에 이체해 주는 건 어때?" 하고는 캐시리스 소사이어티 몰라?  며 퉁을 주려는데 그녀가 싹둑 말을 자른다.


"아니지, 카드하고 현찰은
엄연히 손맛이 다르지~ "


손맛? 아니 이게 무슨  낚시도 아니고 손맛?  


이 여자 참 엉뚱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뭐 실수령인이 그런 구닥다리 방식을 선호하니 별 수 없이 월급날 짬을 내어 은행을 찾았다. 오랜만에 번호표를 뽑고 차례를 기다리자니  비생산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동화 코너의 CD기를 이용하려면  일회 한도 때문에 여러 차례 나누어 인출해야만 하니 이것도 비효율적이다. 


바야흐로 언택트 시대, 모바일 세상에 굳이 월급봉투 만들겠다고 이런 비생산, 비효율적인 발걸음을 매달 반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수고도 이런 수고가 없지 않은가? 평소 내 돈이 내 돈이고  돈도 내 돈이라며 아무 생각 없이 살던 사람이 무슨 바람이 불어  월급타령 현찰타령을 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제 50을 바라보는 갱년기 아내에게는 오늘 이 월급이 생애 첫 급여일지도 모른

이왕 주는 거 기분  좋게 주자'라는 생각에 문구점에서 산  봉투에 아내의 이름을 쓰고 " 6월 급여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같은 문구를 찾아다 베껴 썼다. 


사실 이 봉투를 건네면 평소의 아내 성격상 '설마~  진짜로 준비한 거야? 그냥 한 번 해본 소린데 뭘 이렇게.... '

손사래 치며 받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다. 그럼  봉투 건넨 내 손 부끄러워 어떡하나? 라며 바로 뒤에 있을 겸연쩍은 상황까지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쓸데없는 김칫국.

그녀는 일언반구 없이 봉투를 획 낡아 채고는 성큼 거실 소파에 올라가  5만 원 다발을 흔들며 이렇게 외쳤다.


 "아들딸, 빨랑 나와. 오늘 엄마 돈으로
용돈 푼다. 늦게 오는 사람은 돈 없다"





이 여자, 그동안 돈 생기면 이런 게 하고 싶었던게군.

뭐 이를테면 내돈내산 말고 내돈내준인건가?   

하긴,  돈 주려면 카드보다는 현찰이 제 맛이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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