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입구에 중고 술을 매입한다는 현수막이 처진 봉고차를 보면서. 우리 집은 뭐 내다 팔게 없을까 생각해보니 예전에 선물 받고 먹지 않은 밸런타인이 떠올랐다.
부엌 찬장을 한참 뒤지니 예의 밸런타인 발견. 찾았다 요놈! 그런데 웬 수정방 한 병이 밸런타인 옆에서 배시시 고개를 내민다.
어라? 이 못 보던 중국술은 어디서 난거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뜻밖의 공술을 두병이나 팔 수 있게 되었으니 도랑 치고 가재 잡은 격이다.
내가 가져간 술에 대해 중고 술 봉고자 사장님은 "술병의 색이 바랬네', "박스가 헤졌네" 이런저런 하자를 들더니 밸런타인에 4만 원 , 수정방에 2만 원의 최종 감정가를 매겼다.
6만 원이라~ 술에 대해 잼병인 나로서는 시세에 어두우니 과연 적정한 금액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기대했던 것보다는 나쁘지 않다. 그래도 사장님께는 " 에게~ 이거밖에 안돼요?"라는 억울한 표정은 잊지 않는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아내에게는 보란 듯이 오늘의 뜻밖의 수입 6만 원을 펼쳐 보였다.
자~ 보라! 없던 돈이 생겼으니 이것 이말로 무에서 유, 창조경제 아니겠는가
웬 돈이냐고 묻는 아내에게 부엌 찬장에 숨어있던 밸런타인과 수정방을 발굴해서 현금 트레이드 해왔다고 자랑하니 오히려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 아니 15만 원이 넘게 수정방을 사놓고서는 왜 지금 2만 원에 팔아?"
" 엉? 그 수정방 선물 받은 게 아니고 내가 샀던 거야?"
"기억 안 나? 자기가 10년 전에 중국 출장 갔다 오면서 나중에 쓸 거라며 사와 놓고선, 에구 답답해..." 라며 혀를 끌끌 찬다.
아~ 맞다. 그제야 어렴풋이 선물 받은 술이 아니라 내가 선물용으로 면세점에서 샀던 기억이 떠오른다.
같이 출장 갔던 일행들이 나중에 필요할 수 있으니 미리 한 병쯤 사두라고 하길래 나도 덩달아 무슨 술인지도 모르면서 덥석 샀던 적이 있었다. 순전히 혹시 있을지도 모를 뒷날을 위해...
하지만 비싼 돈을 주고 샀으면서도, 그 용도와 용처가 정해지지 않은 물건은 사람의 기억에서도 쉽게 사라지는 법이다. 게다가 술도 못 마시는 주인을 만났으니 이 중국의 3대 명주는 하릴없이 10년 동안 처박혀 있다가 오늘에서야 겨우 세상 빛을 보게 된 셈이다. 마치 지니의 램프처럼...
하지만 15만 원짜리 술이 고작 2만 원이라니,
쩝...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왠지 입맛이 쓰다. 역시 창조경제란 실체 없는 허상이었다.
이제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때 이 수정방을 샀던 이유, 즉 언젠가, 혹시 있을지도 모를, 누군가를 위한 선물용이란 결국 10년 뒤 이름 모를 중고 양주 사장님에게 헐값으로 상납하기 위한 것이었나 보다.
그건 그렇고, 도대체 아내는 어떻게 10년도 지난 남의 일을, 그것도 가격과 그 상황까지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일까?
별걸 다 기억하는 여자....
같이 살면서 앞으로 행동거지 하나하나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든든한 믿을 구석이 생긴 것 같아 한편으론 안심이다. 나중에 내 기억력이 지금보다 더 가물가물해지면 아내 방 앞에다 커다란 현수막 하나 걸어야 될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