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봄, 딸은 고3으로 올라가더니 가뜩이나 예민한 입맛이 삼한사온 마냥 더 까칠해져서 식사를 거르니 일이 잦아졌다. 그러자 아내는 백화점에서 예쁜 식기 세트 한벌을 사 가지고 왔다. 입맛 없을 때는 보는 맛이라도 있어야 한다면서...
그날부터 우리 집 식탁에는 딸내미 자리에만 전용 밥그릇, 국그릇, 수저 한벌이 따로 놓였고 맛난 반찬은 다른 식구에게는 그림의 떡이 되었다. 혹시라도 오랜만에 올라온 한우를 먹을라치면, 아내가 젓가락을 탁 치며 말한다.
" 그만 좀 먹지~ 고3 먹이게 "
쩝~ 몇 점 손대지도 않았는데, 먹는거 가지고 치사하게...
아내가 음식 층하를 두는 건 밥뿐만 아니라 물도 마찬가지다. 한 번은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먹는데 "왜 당신이 아까운 삼다수를 마셔? 그건 애들 주고 당신은 저~기 저거 마셔"
아내가 가리키는 손가락 끝을 보니 베란다 한켠에 꿔다논 보리자루처럼 놓인 백산수 한팩. 그전까지는 몰랐다. 찬물 아니, 생수에도 위아래가 있는지...
그러던 올해 초, 딸아이가 재수를 시작하자 아내는 아무래도 물을 바꿔 먹여야겠다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 생각해보니까 재수생이 삼다수 마시면 왠지 삼수할 거 같아. 그리고 어감상 삼다수보다 백산수가 느낌이 더 좋지 않아?. 혹시 알아 수능에서 수학 백점 맞을지"
뭐지. 백산수 마시면 산수 백점이라는 이 논리는?
그런 식으로 따지면 삼다수의 다수는 N수생이란 말인가, 혹시라도 생수 회사에서 알게 되면 당장 소송감이다.
수험생 엄마의 마음이 오죽할까....
이해는 하면서도 생수 선택권도 박탈당한 가족 내 서열이 서글프기도 하다. 신혼 초에는 "식사 준비했으니 어서 드세요"라며 살뜰이 챙겨주더니 이제는 아예 찬밥 누룽지 신세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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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에 어쩌다가 불쑥 본가에 들르면 어머니는 자다가도 고등어를 굽네, 된장국을 끓이네 분주히 상을 차리셨다. 행여 밥이 식기라도 할까 봐, 갓 지어 김이 솔솔 나는 뜨거운 밥그릇은 맨 마지막에 상 위로 올려진다.
그런 밥상을 혼자 먹기 미안해서 "아버지~식사 안 하셨으면 같이 드세요"라고 안방에 계신 아버지를 부르려고 하면 어머니는
"우리는 아까 밥 먹었다, 그리고 느그 아버지는 고등어 안 좋아한댄다"
라며 당사자에게 묻지도, 듣지도 않고서도 스스로 상황을 정리하신다. 머쓱해진 아버지는 다시 발길을 돌리며 겸연쩍은 듯 허허 웃으시기만 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어머니는 밥공기를 장롱 안 두꺼운 솜이불속에 넣어두었다가 아버지 퇴근하시면 밥상에 올리시곤 하셨다. 그렇게 따뜻한 밥을 대접받던 가장이었는데 아버지도 나도 어느새 찬밥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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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식탁에서 아내의 갑작스러운 젓가락 태클에 나도 무안해서, 아버지처럼 그저 허허 웃을 뿐이다. 하긴 소고기 먹으면 뭐하겠노 살만 찌겠지~
내리사랑, 치사랑, 나란한 사랑
뜨거운 밥도 언젠가는 식으면 찬밥이 되는 법이다. 따지고 보면 아이들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내에게 찬밥신세가 되는 건 자연스러운 과정일 것이다. 내리사랑 앞에 치사랑은 없다는데, 하물며 부부의 나란했던 사랑은 자식들을 향한 내리사랑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당연한 순리인지도 모르겠다.
찬밥도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는 요즘 세상인데 애들처럼 찬밥 더운밥 투정하는 것도 이젠 그만해야겠다.
우리 딸이 예쁜 식기 세트에 따뜻한 밥, 맛있게 먹고 힘내서 공부할 수 있다면 나는 이빨 빠진 그릇이어도 무엇이 대수랴. 우리 딸이 백산수 마시고 수학 백점 맞을 수만 있다면 대한민국 재수생의 삼다수는 내가 다 마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