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수 꿈을 꾸었을까.
낮잠을 자다 벌떡 일어났다. 연수 꿈이었나 보다.
연수는 갔다. 외국에서 공부 중이라 방학에만 겨우 얼굴 보는 내 동생. 올겨울에도 방학을 맞아 잠시 들어왔다가 엊그제 다시 떠났다. 몇 년을 보내도 보내도 익숙해지지 않는 배웅 길의 여운은 나를 며칠이고 잡아둔다. 있다가 없으면 빈자리가 유독 도드라지는 법이니, 연수가 남기고 간 자국들이 자연스레 사라질 때까지 며칠만 공허함을 참아내면 된다. 물론 나는 부모님과 함께 있지만, 나의 가장 좋은 친구이자 활력소, 그리고 너무 사랑하는 동생의 자리는 또 다르니까.
그런데 이번은 좀 이상하다. 며칠이 지나도 공허함과 외로움이 가시질 않는다. 여느 때와 같이 동생은 다시 공부하러 갔고, 이다음에 또 들어오게 될 텐데 이상하게 나는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동생이 간 것뿐인데 왜 이렇게까지? 부모님은 도대체 왜 연수를 그 어린 날부터 외국으로 보낸 걸까라는 투정 섞인 무의미한 질문을 던지며 부모님이 미워질 정도였다. 뭔가 잘못됐다. 어딘가 내 마음에 보수가 필요한 부분이 있었다.
마침 우희가 내일 급 1박 2일 제주도 여행을 가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고여있는 기분을 벗어나기 위해 나의 주변을 바꿔보면 좋을 것 같아 그러자며 바로 다음 날 비행기표를 끊었다. 떠나기 겨우 몇 시간 전, 우희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회사 일이 너무 바빠 휴가를 취소해야 한다며 정말 미안하다는 전화 속 그녀의 축 처진 목소리. 너무 미안해하는 우희의 말간 얼굴과 곤혹스러운 그녀의 상황을 생각하니 그래, 네가 무슨 잘못이겠니 싶었다.
이왕 비행기표도 끊었겠다, 혼자만의 시간도 필요했겠다 가서 조용히 마음을 보듬어주고 오기로 했다. 가면 일단 눈을 보고 싶었다. 카페도 두 군데 이상 가야지. 가서 따뜻한 라떼 마시면서 마음껏 일기도 쓰다 올 거다. 비울 건 비우고, 채울 건 채우자. 뭘 비우고 뭘 채우고 싶은 걸까, 뚜렷한 정체는 모르겠지만 내일 몸을 움직이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되리라. 그렇게 백팩 하나를 메고 제주도로 향하는 밤 비행기에 올랐다.
게스트 하우스의 작은 방에 짐을 풀고는 맥주 한 캔을 마시고 바로 잠이 들었다. 1박 2일이라고는 하지만 거의 당일치기에 가까웠기에 아침부터 바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제주도엔 이미 눈이 많이 와 있었고, 아침을 먹으러 나선 발걸음 아래 뽀드득 눈 밟히는 소리와 시리도록 파란 하늘에 벌써 기분이 좋아졌다. 아침 메뉴는 따뜻한 고기 국수. 어젯밤에 찾아두었던 국숫집을 향해 눈 위에 발자국을 남겼다.
역시 한국은 패스트푸드의 원조이던가. 앉아서 주문하자마자 고기 국수가 나왔고 뜨뜻한 국물을 한 숟갈 뜨자, 잠깐 걸었다고 설 얼은 몸이 녹는 듯한 기운에 속으로 행복하다, 행복하다를 연신 외쳤다. 그리곤 비움의 순간이 생각보다 빨리 그리고 뜬금없이 찾아왔다. 나는 왜 하필 이때 혼자 여행을 오게 되었는가, 지금 이 순간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나는 혼자서도 이렇게 행복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연수가 떠난 지금, 나는 혼자지만 이 사실에 붙어있는 외롭다는 감정을 비워내고 행복하다는 감정을 채워야 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나는 그런 사람이니까. 누군가의 존재 여부에 내 행복을 좌지우지하지 않으니까. 뜬금없이 찾아온 깨달음의 순간에 모든 감정을 리프레쉬할 수 있었고, 남은 건 제주도를 듬뿍 마음에 눈에 담아 가는 일이었다.
국수를 먹고는 우희가 가장 가고 싶어 했던 사려니숲길을 갔다. 버스도 잘 오지 않고 눈은 내리고, 헛걸음질 할까 봐 가지 말까 하다가 가보고 정 아니면 빨리 돌아오자는 마음으로 겨우 버스에 올랐다. 겨울왕국처럼 온 거리며 도로며 숲이며 하얀 세상 속을 버스가 천천히 가는데 속도 때문이 아니라 이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시려고 그러나 싶은 로맨틱한 생각도 들었다.
한 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사려니숲길은 눈이 많이 와 출입을 통제한다는 팻말뿐이었다. 멀리는 못 들어가고 입구만 구경하려고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길이 만들어진 곳만 들어갔다. 눈이 정말 너무 많이 쌓여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사방에서 간간이 눈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눈과 높게 뻗은 삼나무들의 조화라니, 말도 못 하고 혼자 멍하니 눈앞의 풍경을 바라봤다. 자연에 압도되는 경이로운 기분이 들어 눈물이 핑 돌았던 순간.
유독 사람이 없었던 오늘, 어느 순간 주위를 둘러보니 나 혼자였고 내 발걸음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눈 떨어지는 소리와 새소리가 아니었다면, 이곳은 음소거의 세계인가 싶을 정도로 고요했다. 방 안에 혼자 있는 것보다 더 고요하게 느껴졌으니 그간 우리는 얼마나 인지하지도 못하는 수많은 소음에 둘러싸여 있는 건가 싶었다. 그렇게 한참을 구경하다가 더 있다간 발이 얼어버릴 것 같아서 버스를 타러 돌아갔다.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풍경이다.
오후 비행기들이 줄줄이 연착이길래 내 비행기도 연착이려나 싶었다. 슬며시 비행기가 내일 떠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핑계 대고 딱 하루만 더 있기 좋은데 말이야. 그러나 연착 없이 정상적으로 비행기는 운행됐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는 엄마와 아빠에게 쪽지 같은 편지를 썼다. 카드에 쓸까 하다가 특별한 날도 아니고 괜히 더 신경 쓴 것 같으니 쑥스러워서 다이어리 한 장을 투박하게 찢었다.
짧은 여행을 하면서 느낀 것들을 적었다. 항상 묵묵히 나를 믿어주시는 것도 있지만 혹여 나에게 예민한 질문을 하게 될까 궁금해도 참는 엄마와 아빠를 위해서. 추워서 그런지, 쑥스럽고 죄송해서 그런지 마음을 글자로 옮기며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부디 이 편지를 읽고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아무래도 후자인가 보다. 돌아가자 나의 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