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군지 정말 모르겠는데 누군지 알아야만 했던 스물다섯 무렵이었다. 얽힐 대로 얽힌 마음의 실타래를 어찌 풀어야 할지 몰라 끙끙거리고 있을 때, 글을 쓰며 꼬인 실을 조금씩 풀어나가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머릿속 정체 모를 생각들이 손끝을 타고 조금씩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게 그저 신기했다. 숨 가쁘게 운동을 하고 나면 몸이 개운해지는 것처럼 그저 펜 끝으로 쉴 틈 없이 생각을 풀어놓다 보면 정신이 상쾌해졌다.
그때부터 내게 '산다'와 '쓴다'라는 아주 긴밀하게 이어진 관계가 되었다. 취미로서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내가 쓰는 글이 선명한 나이자 더 나은 나로 향하는 방법인 만큼 내가 쓰는 글이 곧 나의 직접적인 삶이 되었다.
글을 향한 작은 불씨는 꺼질 듯 꺼지지 않고 4년 동안 뭉근하게 제 빛을 발했다. 처음엔 그저 일기처럼 나를 위한 글이, 조금씩 읽어주는 사람들이 생기면서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공감을 형성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어졌다. 그렇다고 글을 특출나게 잘 쓰지도 않으니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무엇보다도 내 글은 결국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향해 있는 글이다 보니 더욱 작가는 나와 거리가 멀다고 판단했다. 나는 그냥, 쓰고 싶은 사람이었다.
근데 왜 이리 내 마음은 얄궂고 아이러니한 건지. 좋은 생각을 자신만의 문체로 녹여내는 사람들을 보면 나도 김연희다움이 진하게 묻어있는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항상 거기서 거기인 것 같은 내 글에 스스로 권태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그저 나를 잘 쓰고자 글을 쓴다고 했으나 이왕 쓰는 거 더 잘 쓰고 싶은 마음이 불쑥 고개를 든다.
요 며칠은 글 쓰는 것도 싫고 책 읽는 것도 싫어 다 내팽개치고 살아진 대로 살았다. 아무리 막살아도 머리 마저 막살게 두는 건 또 용납할 수 없는 나인지라 기분도 전환할 겸 미용실을 예약했다.
보는 사람마다 놀라는 머리숱 부자인 내가 미용실에 간다는 건 최소 4시간을 꼼짝없이 앉아 있어야 한다는 의미기도 하다. 소중한 4시간을 날리지 않으려면 무의미하지도 않으면서 몰입할 수 있는 콘텐츠로 시간을 채워야 한다. 그러기엔 또 활자만 한 게 없다. 그냥 갈까 고민을 하다 지난 대구 여행에서 사온 임경선, 요조 작가님의 <여자로 사는 우리들에게>를 휙 뽑아 들고 집을 나섰다. 요즘 책 읽기 싫으니 가서도 읽기 싫으면 안 읽을 거라 괜히 혼자 투덜대며. 누가 뭐랬나.
어떤 머리를 할지 상담을 마치고, 담소도 조금 나누다 이야기 소재가 떨어질 때 즈음이 됐다. 굳이 책을 가져와서는 안 펴는 것도 이상해 보일까 머리를 만져 주는 스텝의 시선을 매우 의식하며 책을 펼쳤고, 그렇게 자연스레 대화는 끝이 났다. 그리곤 몇 장도 채 안 읽었을 때 이미 내 마음은 댕댕 - KO를 외쳤다. 책 싫다던 나는 도대체 누구였는지. 그새 임경선 작가님과 요조 작가님이 나누는 대화에 푹 빠져들었다. 곁에 두고 싶은 인생 선배들의 대화 사이에 없는 듯이 앉아 숨을 죽이고 서로에게 쓴 편지를 읽어 내려갔 다. 책을 펼쳐두고 정신없이 핸드폰 메모장에 필사하는 손가락 끝에서 익숙한 쾌락이 전해진다.
29년을 살아오며 어렴풋이 느끼고만 있던 것들을 더 깊고 풍부하게 마주하면서도, 섬세하고 맛깔난 언어로 풀어내는 두 사람의 글을 보며 내 안에서 또 무언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가장 쉽게 솟아오르는 어떤 욕구라고밖에 설명을 못 하겠다.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 내가 가진 다양한 조각을 글로써 잘 표현하고 싶다는 욕구. 무기력의 상태였다가 좋은 문장과 좋은 생각을 만나니 갑자기 또 솟아오른 마음을 어찌할 줄 몰라 빨간 양장본의 책을 몇 번이나 펼치고 덮길 반복했다. 어떻게든 이것을 표현하지 않고는 못 살겠구나, 산다고 하더라도 생생하게 살지는 못하겠구나 싶었다.
언젠가 내 미래가 너무 불안해 겁도 없이 무작정 찾아간 점집에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너는 글 쓰면 안 돼. 그거 하면 금방 그만둘 거야.”처음으로 취미가 아닌 업으로써 글을 쓰는 일은 어떨지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시기라 누구에게도 이야기한 적 없는 주제였다. 그런 내 마음을 아주 날카롭게 끄집어내니, 숨긴 적도 없는데 아주 크게 들킨 사람마냥 나는 화들짝 놀라 아 진짜 그런가 하며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처음 만난 사람의 말을 믿고 스스로 꼬리를 자른 날이었다.
그러나 4년이 지난 지금, 그때 잘린 꼬리만 자라지 않 고 쓰는 마음은 되려 더 커져 버렸다. 그 속에서 기쁨 과 슬픔과 성취와 좌절을 느끼면서도 끊임없이 더 잘 하고 싶었다. 내 시선으로 써 내려간 20대의 기록을 책으로 엮겠다며 이윽고 또 한 번 감당하고 싶은 고통 속으로 스스로 뛰어든다. 그리곤 다른 사람들의 기깔나는 책들을 보며 책은 역시 이런 사람들이 쓰는 거지, 하며 4년 전 잘려 나간 꼬리를 생각하는 일의 반복. 그러다가도 결국 임경선과 요조의 책을 읽는 오늘 같은 날이면 마음속 무언가가 또 불끈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정말 어쩔 수 없는 건 이거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결국 수많은 파도 속에 퇴색하지 않는 건 단 하나 쓰고 싶다는 욕구였다. 표현하고 공유하고 싶은 마음. 별달리 이룬 건 없지만 내 안에서는 쓰고 싶다는 마음 외에 모든 부수적이고 쓸데없는 마음들은 조금씩 낡고 부서져 간다. 단적으로 점쟁이가 했던 나는 글 쓰면 안 된다는 그 말. 마음이 울적해지는 날에 내게 그 말은 여전히 입김이 세지만, 그조차도 시간이 갈수록 내 안에서 점점 제 힘을 잃어간다. 진짜 그럴 수도 있겠으나 그건 정말 해봐야 아는 것 아니겠냐는 마음이 힘이 아주 조금씩 더 단단해진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표현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내가 전달하고 싶은 건 무엇일까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행하게 한다.
그러니 나는 언젠가 그 점쟁이의 말을 끝내 벗어던지고 말지 않을까. 4년이라는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여도 그 누구도 아닌 나의 진짜 마음이 제 힘을 기르기까지 스스로 지켜보고 있었던 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나의 속도다.
좋은 책을 한 번에 읽어버리는 게 아까워 차마 미용실에서 다 읽지 못하고 집에 와 마저 읽으며 천천히 문장을 곱씹어봤다. 책을 덮고 난 다음의 가장 주된 감정은 질투와 설렘이었다. 특히 요조 작가님. 모르는 이의 글이 짜증이 날 정도로 좋아서 부럽고 질투 한 적이 있었나 싶다. 그것도 상대는 매우 유명한 사람이다. 오히려 나보다 조금 더 나아 보이는 사람이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상대도 안 될 것 같은 상대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다니 스스로 웃기고 귀엽고 조금 짠하기도 했다.
막을 길 없이 솟아오른 오늘의 마음과 함께 이런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는 작가가 한 명 더 늘었다. (임경선 작가님의 문장들은 원래도 수백 번씩 마음에 새기며 살아가고 있었으니.) 나도 뭉근한 이 불씨를 이리저리 되는대로 잘 다듬어가 본다면 10년 즈음 후 에는 나만의 결로 깊어질 수 있지 않을까. 걱정보단 기대하는 마음으로 잘 가꾸어가자고 이미 수백 번은 한 다짐을 오늘도 또 한다.
그래서 다시 앉아 이렇게 쓴다. 내 책의 일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뭐가 그렇게 얽혀있는지 모를 마음을 두서없이 꺼내놓는 행위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며 또 쓴다. 잘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지 않고 일상의 꾸준함으로 잘 승화시키며 지금까지의 속도로만 계속 나아가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 글이 커서 뭐가 될까를 기대하며 쓰다 보면 고개가 빳빳해져 자칫 꺾이기 쉽다. 그러니 그저 일이 되었든 일상이 되었든 글을 쓰는 일은 멈추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느슨하고 꾸준하게 이어가본다. 걸릴 것 없이 솟아오르면 솟아오르는 대로 자유롭게, 또 나답게 표현하는 그날이 언젠가 분명 오겠지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