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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ee Oct 20. 2021

하기 싫은 일도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것


2017년 8월, 같이 인문학을 공부하던 친구들과 '지하철 미션'이란 걸 하게 된 적이 있다. 지하철 미션이란 지하철 안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내가 가진 두려움을 크게 얘기하고 그 두려움을 떨쳐내는 일이었다. 꼭 해야하는 일도 아니고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지만, 당시 나는 스스로 옥죄는 틀을 깨고 나아가고 싶었던 시기였기에 상상만 해도 아찔한 그 미션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스스로 참여하겠다고 했지만 막상 미션을 수행하기로 한 날이 되자 모두가 안고 살아가는 두려움, 그게 뭐라고 그렇게까지 하나 싶은 거부감이 올라왔다. 친구들은 다 하겠다고 했고 나 혼자만 이제 와서 안 하자니 그건 또 싫어 어기적어기적 꿈속을 뛰는 사람처럼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 앞에 서서 입을 여는 그 순간을 상상하니 벌써 온몸이 굳어 누구 한 명 잘못 걸리면 큰일 날 것처럼 날이 섰다.


적당히 여유로운 공기가 도는 일요일 오후의 2호선 지하철 안, 긴장에 잠식되어버린 나를 뒤로하고 지하철 미션이 시작됐다.


퇴직 후 용기를 얻고 싶다는 J군부터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싶다는 K양 등, 친 구들은 나처럼 떨려 하다가도 한 명씩 용기를 내 하고 싶은 얘기를 하고 후련하게 웃어 보였다. 그제야 나의 마음 저 깊은 곳에서도 하고 싶은 얘기가 꿈틀꿈틀 올라왔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과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붙들고 사람들 앞에 섰다. 이대로 삶이 끝나도 이상하지 않겠다 싶을 만큼의 긴장 속에 일단 한 마디를 크게 내질렀다.


"안녕하십니까,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이 자리에 선 김연희라고 합니다!"



지극히 평범하게 남들 하던 대로, 꼭 '해야 한다'라는 것만 하면서 대학 시절을 보냈다. 조금이라도 어렵고 무서운 일은 최대한 피하며 살아왔다. 하고 싶은 게 많았으나 혹여나 실패할까 두려워 고민만 하다가 떠나보낸 것들이 부지기수였다. 어려운 상황을 일부러 마주 하고 싶진 않았다. 바로 오늘같이.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나를 잃는 느낌이었고 계속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나다운 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도 나답게 살고 싶었다. 앞으로의 인생에서 더 힘든 선택과 어려움이 많을 거란 걸 어렴풋이 알기에 이렇게 마냥 피하면서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이런 내 마음을 두서없지만 떨리고 갈라지는 목소리 그대로 전했던 것 같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그것도 심지어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드러낸 나의 두려움이었다.


이상한 사람으로 볼까 우려했던 바와는 달리 힘차게 손뼉 쳐주는 사람들과 눈시울을 붉혔던 또래의 여성분, 저 멀리서 힘내라고 외쳐주신 아주머니까지 생각 보다 많은 사람에게 응원을 받으니 그제야 내가 반쯤 울고 있다는 걸 알았고 그 속에 또 웃음이 피었다.




지하철 미션을 했던 당시 나는 나를 위한 1년의 유예 기간을 갖고 있었다. 남들 다 정신없이 취업을 향해 달릴 때 단 한 줄의 자소서도 쓰지 못했던 내가 나 자신과 내가 좋아하는 일에 대하여 고민하고 싶다며 선택했던 일이었다. 주변의 많은 걱정을 뒤로하고 혼자 여행도 다니고 생존적 책 읽기도 하다 '인큐'라는 나를 공부하는 학교를 알게 되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뭘 좋아하는지 차츰차츰 알아가던 참이었다. 그러던 중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지하철 미션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날 지하철 미션을 하고 나서야 한 가지를 깨달았다. 나에게 1년의 유예 기간을 주기로 결심한 그날, 나는 나에 대해서도 알고 싶었지만, 그 마음 반대편에는 내가 해야 하지만 하기 싫은 것으로부터 도망쳤으며 책임지려 하지 않았다는 것을. 내가 진짜 무언가를 하고 싶다면 하기까지의 무섭고 싫고 힘든 과정 또한 감내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면서 겪어야 하는 과정까지도 내가 좋아하는 일이길 바랐던 것 같다.




그 후로 반년하고도 두 달이 지났다. 영문학을 공부하고 졸업한 나는, 문학과 대척점에 있는 듯해 보이는 UX 디자인 분야로 발을 내딛어 보고자 준비하는 중이다. 뼛속까지 문학도가 공학과 디자인의 접점인 UX 디자인을 하려니 맨땅에 헤딩하는  셈이었다. 다만 이게 내가 하고 싶은 일에 가까운 것이라고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하고 싶은 일이면서도 너무 다른 분야라 두렵고 부딪 혀야 할 것들이 많아 움츠러들 때도 많다. 원하는 일 을 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어깨를 펴는 일이 반복된다. 혼자 헤매고 방황하다 책을 한 권씩 읽어보는 것부터, UX 디자인의 개념을 스스로 정리해 글로 써보는 작은 것부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관련 교육을 찾아 듣게 됐고 난생 처음 포트폴리오란 걸 건드려 보기 시작하다가 바로 며칠 전, 한 디자인 에이전시에서 같이 프로젝트를 진 행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정규직도 대단한 일도 아니지만 드디어 작은 물꼬를 텄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이제부터 진짜 시작일 테다. 여전히 이 분야에 대해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고 100% 확신하진 못하겠다. 멋져 보였던 이 업계의 녹록지 않은 현실도 익히 들어왔다. 그러나 '인생을 결정하는 건 무얼 즐기고 싶은지가 아니라 어떤 고통을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다.'라는 누군가의 말을 빌리자면, 그리고 지하철 미션을 했던 날의 나를 떠올리면, 나는 다른 어떤 분야보다 UX 디자인을 하며 따르는 힘든 부분을 겪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게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반대로 하기 싫은 과정을 기꺼이 거치겠다는 말과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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