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20대로 돌아가면 어떡할 거예요?” 그럴 때마다 나는 “1분 1초도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말해왔다. 이미 아는 고통을 생짜로 다시 겪을 순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3년 전부터 생각이 바뀌었다. 만약 20대로 돌아갈 수 있다면 망설임 없이 의과대학에 간다. 재수, 삼수, 사수, 구수도 두렵지 않다. 나는 주저 없이 산부인과 의사가 되거나 여성 질병을 연구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뭐라도 배우고 개선할 것이다. 질염이 이렇게 삶의 질을 파괴하는지 그전엔 몰랐었다.
며칠 좀 피곤하네… 좀 스트레스받네… 하니까 금방 질염이 도졌다. 나는 예전에 영화팀에서 일할 때 처음 질염이 걸렸다. 코로나 치료 대신 감기약으로 버텼더니 면역력이 완전히 망가진 것이었다. 미칠듯한 가려움에 검색해 보니 이게 바로 질염이고…… 한번 걸리면 재발이 쉽고……
하…… 망했다.
여성들에게 ‘감기’같이 흔한 질병이라고 했다. 감기… 감기요? 근데 왤케 쉬쉬해요? 이런 가려움과 냉과 치료하는 모든 과정을 흔히 달고 다닌다니요. 질염에 걸려본 사람은 알 것이다. 하루 종일 몸에서 알람이 울리는데 끄는 버튼이 없다. 내 남은 생에 이런 과정이 수없이 반복될 거라니... 열받는다. 치료법으로는 스트레스를 받지 말고 면역력을 키우랬다. 나도 그럴 수 있다면야 정말 좋겠다. 그런데 세상살이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거 나만 이런 건가 싶어 혹시나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사실 자기들도 있단다. 아니 왜 다들 나한테 비밀로 했니? 세상아 이게 맞는 거냐구요. 여태껏 이런 고통을 알음알음 인내하다니 여자들 너무 착해빠졌잖아! 생리, 임신과 출산, 자궁 질환 등 여성의 몸과 질병은 여전히 소외돼 있단 걸 겪어보니 뼈저리게 느낀다. 이미 삼십 대 중반을 훌쩍 넘었는데도 내겐 아직 더 알아야 할 몸이 있다.
한 이틀 동안 질염은 아니겠지 하며 명상 같은 걸 해봤지만 오늘 아침 일어나자마자 ‘병원에 가야 해!’라는 느낌이 왔다. 산부인과 문 열자마자 바로 뛰어갔다. 산부인과 진료는 정말이지 적응도 안 되고 적응하고 싶지도 않다. 다른 병원은 약만 처방하는데 그나마 이 병원이 드레싱을 해줘서 오긴 온다만 소독이랑 연고를 바르는데 너무 확확 휘젓는 것 같아서 기분이 안 좋았다. 부위 때문인지 늘 희미한 불쾌감이 잔잔하게 깔린다. 내 귀를 저렇게 휘저을 수 있을까? 내 코나 눈은? 저 의사가 질이 있었어도 이렇게 진료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 정신 건강에 안 좋다. 하지만 그 의자에 앉아 누우면 자동적으로 이런 생각만 하게 된다. 왜 여자로 태어나서 이런 쉬쉬하는 병을 평생 쉬쉬하며 달고 살아야 하는지 원통스럽다. 아니 그보다 이렇게 흔한 여자들의 질병을 ‘평생 관리하는 병’으로 놔두는지 모르겠다. 모두가 매달 생리를 하고 흔히 질염에 걸리는 몸을 가졌다면 어땠을까. ‘남자들이 임신했다면 낙태 클리닉은 스타벅스처럼 있었을 거고, 사후 피임약은 맛별로 출시됐을지도 모른다’라던 농담은 언제쯤 재미 없어지려나.
약 처방을 받고 이틀에 한 번씩 병원에 와서 소독하기로 하고 나왔다. 지난 3년간 데이터를 내봐도 나는 감기보다 질염을 더 달고 산다. 감기라고 말한 사람들 다 나와라. 감기도 이렇게 자주 걸리면 입원해야 한다. 그리고 한번 치료할 때 주기적으로 꼬박꼬박 이틀에 한 번씩 오지 않으면 내성 생긴다고 처치를 안 해주기 때문에 꾸역꾸역 와야 한다. 어떤 현대인이 이틀에 한 번씩 병원 진료 시간 중에 꾸준히 갈 수 있단 말인가. 지난번엔 외주 기간과 겹쳐서 한번 3일째에 갔더니 의사가 이럴 거면 치료 효과가 없다고 더 이상 드레싱 안 해주겠다고 했다. 오늘만 받고 가면 안 될까요 선생님. 다른 병 같았으면 내가 이렇게 설설 길 이유가 없다.
그리고 뭐 요즘은 개방적이네 어쩌네 해도 여자들은 산부인과 문만 열어도 죄인 된 기분을 감출 수 없다. 자궁경부암 검사에서 뭔가가 나와서 추가 검사를 해야 했을 때, 그게 8만 원 정도 했을 때, 6개월에 한 번씩 검사받아야 한다고 했을 때 내가 느낀 좌절감 같은 건 뭐였을까. 어디서 옮았는지 되짚어 볼 때 그 더러운 기분은 왜 늘 나만의 몫인지. 그에게 난 지나간 연애일 뿐이지만 나에게 그는 바이러스로 남았다. 세균맨 새끼. 몸 간수가 여자에게만 일방적으로 쏠려있다면 세상의 반인 우리는 어디서 평등을 찾아야 할지 의문이다.
이 글을 쓰며 여성 질환을 ‘쉬쉬’하는 세상에 화가 나 있었지만 정작 나도 내 상태를 알리는데 머뭇거렸다. 왜 내가 망설였냐면. '질염'이라고 했을 때 문란하다든지 하는 잘못된 지식이 뭔지 너무 알고 있고 사람들이 날 그렇게 볼까 겁이 났다. 단지 흔한 병이라고 다들 알면서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나도 왠지 동참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대단한 해방을 외치고자 한 것도 아닌데 여전히 내 안에 잣대에 턱턱 걸려 넘어진다.
지금은 일을 하고 있지 않아 치료받을 시간이 나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런 것도 다행이라니, 세상이 정말 다행 천지다. 참 고맙다. 어쨌든 경고등이 한번 울렸다. 잠을 잘 자야 한다. 질 유산균도 주문해야 하고 칸디다균 일지도 모르니 단 음식도 끊어야 한다. 아, 진짜 쫌! 빡치는 기분은 어쩔 수가 없다. 뭐든 겪어보고 나서야 배운다. 여성의 병은 너무 많고, 말하지 않고 견디기엔 삶이 너무 길다는 것을. 남은 생 내 몸과 갈등조정을 잘해나가며 살고 싶다. 일터에서도 내 안에서도 온통 조율할 것들이다. 아, 아무래도 어른들 말처럼 의대에 갔어야 했다. 이번 생에 의사로 살 수 없는 것이라면, 다음 생! 다음 생엔 제발, 반드시 잊지 않으리…